
1. 동굴 밖의 찬란한 빛과 성령이 주시는 자유의 한계선
플라톤의 유명한 철학적 비유인 『동굴의 비전』을 살펴보면, 평생 어두운 지하 동굴에 갇혀 벽면에 비친 희미한 그림자만을 진리로 믿고 살아가던 인간이 마침내 결박에서 풀려나 찬란한 태양 빛이 가득한 외부 세계로 걸어 나오는 극적인 장면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러나 평생 어둠에 길들여져 있던 눈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마주한 그 눈부신 빛을 감당하지 못해 깊은 통증을 느끼며, 진정한 해방인 빛을 오히려 고통으로 여겨 그 찬란한 빛을 견디는 법을 온전히 배우기 전까지는 역설적이게도 과거의 익숙했던 어둠의 감옥을 다시금 그리워하곤 합니다.
장재형 목사(미국 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의 복음 강해 설교는 바로 이러한 영적·철학적 딜레마의 지점에서 오늘날 현대 교회가 누리고 있는 ‘자유’의 참된 진위 여부를 날카롭게 질문합니다.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사탄과 죄악의 처절한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참된 영적 자유를 얻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이자 말씀의 울타리인 ‘질서’ 안에서 방종하지 않고 도리어 더 깊고 안전한 자유를 만끽하며 누릴 수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에 초정밀하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은 우리를 얽매던 사망과 죄의 모든 사슬을 단번에 끊어내지만, 그렇게 얻은 영적 자유는 내 육체의 본능과 정욕대로 아무렇게나 흩뿌려지는 무절제한 폭발력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거룩한 사랑과 겸손한 순종을 도구 삼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든든히 세워나가는 은혜의 호흡이자 성화의 에너지입니다.
이 강해 설교가 우리에게 지극히 중대한 영적 이정표가 되는 까닭은, 복음 안에 흐르는 자유와 질서라는 두 가지 핵심 가치를 단순히 기계적인 수평이나 도덕적인 균형 감각의 차원으로 다루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자유는 인간의 얄팍한 혁명이나 결단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전적인 자비로 베풀어 주시는 영혼의 완전한 해방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질서는 그 영광스러운 해방의 감격이 공동체 내부에서 육체의 방종으로 변질되지 않고 영원한 아가페의 사랑으로 오래 머물도록 보호해 주는 거룩한 신앙의 형태이자 안전장치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복음은 죄 아래 갇혀 있던 개인의 내면세계를 혁명적으로 갱신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구원받은 자들의 총합인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진리를 배우고, 사명을 위임하며, 고난을 견뎌내고, 쓰러진 자리에서 다시 연대하여 일어설 것인가를 종합적으로 묻고 있습니다.
2. 성령의 신성한 바람과 말씀의 방둑이 이루는 영적 조화
본 설교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도가 누리는 복음적 자유를 결코 개인주의적인 방임이나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는 자기주장의 언어로 격하시켜 설명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영접한다는 것은 나를 옥죄던 죄와 사망의 법에서 영원히 해방되는 우주적인 사건이지만, 그 영광스러운 해방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이탈하여 내 맘대로 살아가는 이기적인 자율성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성령의 주권적인 통치 안에서 주님의 인격으로 매일 새롭게 빚어지는 거룩한 삶의 연속성입니다. 만약 우리의 자유가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라는 단단한 뿌리를 잃어버리면 그것은 순식간에 육체의 쾌락을 좇는 추악한 방종으로 기울어지게 되며, 반대로 공동체의 질서가 성령의 역동적인 생동감을 억누르고 가로막으면 영혼을 죽이는 차가운 종교적 제도와 딱딱한 형식주의만 남게 됩니다. 장재형 목사가 전하는 신학적 통찰의 위대함은, 바로 이 방종과 형식주의라는 두 가지 치명적인 위험의 절벽 사이에서 복음이 제시하는 가장 안전하고도 생명력 넘치는 거르고 좁은 길을 완벽하게 찾아내는 데 있습니다.
설교의 논지를 따라가면, 성령의 강력한 이끌림을 받는 은혜의 사람들을 복음이 없는 외부 세계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는 지독하게 시끄럽고 무질서한 소요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면세계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오직 하나님의 살아 숨 쉬는 말씀으로부터 비롯된 가장 질서 정연하고 엄위한 영적 체계가 작동하고 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신약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성령 강림 사건 직후,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권능에 사로잡힌 제자들이 거리로 뛰쳐나가 각국의 방언으로 복음의 대주제를 담대히 선포했을 때, 영적 안목이 없던 예루살렘의 군중들은 그들을 향해 “저들이 대낮부터 새 술에 취하였다”라며 조롱하고 무질서한 광기로 치부해 버렸습니다. 이장면은 성령이 행하시는 폭발적인 영적 역동성이 인간들이 규정해 놓은 차가운 정적주의나 경직된 무질서와는 그 차원이 완전히 다름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의 마음을 강력하게 진동시켜 사명의 자리로 움직이게 만들고, 닫혀 있던 입을 열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외치게 하며, 매너리즘에 빠져 잠들어 있던 교회 공동체를 사정없이 흔들어 깨우십니다. 그러나 그 거룩한 흔들림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붕괴의 폭력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질서를 향해 교회의 기초를 새롭게 배열하시는 은혜의 진동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교회는 성령의 역동적인 자유와 폭발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인간의 교만과 두려움으로 만든 인위적인 규격과 제도의 틀 안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가두어 두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동시에 ‘영적 자유’라는 달콤한 명분을 내세워 교회가 피로써 지켜온 정통 교리와 신앙 고백의 거룩한 중심 기둥을 함부로 흐리거나 훼손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설교가 그토록 강조하는 역사적 정통 신앙 고백과 성경적 신학의 토대는, 성도의 자유를 억압하고 감금하는 창살이나 감옥의 울타리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성도의 자유가 사탄의 거짓에 흔들리지 않도록 뼈대를 잡아주는 영적 척추이자 든든한 방패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참된 자유는 아무런 법도 제한도 받지 않는 무법천지의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진리의 법안에서 아무런 두려움과 거리낌 없이 마음껏 하나님을 예배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신성한 능력입니다. 교회의 신성한 질서는 자유를 억압하는 대적이 아니며, 오히려 그 자유가 사탄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영원한 은혜의 방향으로 안전하게 흐를 수 있도록 물길을 인도해 주는 튼튼한 한 쌍의 강둑과 같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성경 말씀을 깊이 있게 가르치고 배우는 신학 교육은, 교회의 외적인 규모를 키우기 위한 단순한 부속 장치나 취미 프로그램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교회 공동체가 생존하기 위해 잠시도 멈출 수 없는 영적인 산소 공급이자 호흡 그 자체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날마다 복음의 심오한 깊이와 의미를 성경을 통해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한다면, 그들이 말하는 자유는 너무나 쉽게 개인의 일시적인 감정과 영적 카타르시스 수준으로 격하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질서 또한 영혼을 소생시키는 어머니의 품이 아니라 인간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관리하기 위한 관료주의적 기술로 굳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명확한 진리와 정통 교리의 토대가 반석처럼 분명하게 서 있을 때, 성도 각자가 받은 다양한 성령의 은사들은 결코 공동체 안에서 시기와 질투로 부딪히지 않고, 오직 교회와 이웃을 겸손히 섬기는 거룩한 통로를 스스로 찾아가게 됩니다. 교회는 말씀의 차가운 절도와 성령의 뜨거운 불길을 두 손에 함께 품을 때 비로소 성령의 신선한 생동감과 경건이 자아내는 거룩한 아름다움을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게 됩니다.
3. 바나바와 바울의 아름다운 세대교체와 위임이 주는 선교적 번식력
사도행전이 증언하는 선교의 장엄한 흐름은 초대교회의 위대한 두 거두인 바나바와 바울의 선교 모델을 통해 우리에게 가장 완벽한 영적 전환점을 보여줍니다. 사도행전 13장과 14장의 이방인 선교 초기 기사를 읽어보면, 언제나 공동체의 영적 권위와 리더십의 중심에는 ‘바나바’의 이름이 바울보다 항상 전면에 먼저 등장하고 서 있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됩니다. 바나바는 영적 지도자로서 교회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선교 여정이 본격화되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이방 세계 한복판으로 깊숙이 침투해 들어가는 어느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자, 리더십의 중심추는 바나바에게서 바울이라는 새로운 인물에게로 자연스럽고도 완벽하게 이동하며 바울이 선교의 전면에 우뚝 서게 됩니다.
인간의 타락한 정치적 관점이나 세상의 권력 투쟁의 시각으로 보면 이것은 시기와 질투가 난무하는 경쟁의 승패나 권력의 이동으로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복음의 세계 안에서 이 거룩한 리더십의 전환은 결코 그런 저급한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떻게 다음 세대의 사람을 존귀하게 세워나가는가를 보여주는 가장 고결하고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의 질서이자 사랑의 극치였습니다. 바나바는 영적 아비로서 자신이 가진 기득권과 앞자리를 고집스럽게 지키려 하지 않았고, 도리어 하나님께서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더 크게 들어 쓰시도록 자신의 어깨를 내어주어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희생적인 양보와 위임의 길 위에서, 초대교회의 선교는 한 개인의 탁월한 역량에 의존하는 고독한 레이스를 뛰어넘어 공동체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거룩한 우주적 사명으로 위대하게 확장될 수 있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사도행전의 이 감동적인 세대교체 장면을 영적 거울로 삼아, 오늘날의 지상 교회가 끊임없이 자기를 부인하며 ‘다음 사람을 예수의 제자로 세우는 복음적 재생산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엄숙하게 강조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위대한 선교와 목회는, 내가 낳은 영적 열매나 사람들을 내 사사로운 영향력의 울타리 안에 오래도록 붙잡아두어 나의 종교적 왕국을 건설하는 이기적인 야욕이 결코 아닙니다. 진짜 선교는 나를 통해 복음을 영접한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체계적으로 배우고 온전히 소화하여, 이제는 사도의 도움 없이도 자기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삶의 현장과 자기 고유의 문화적 언어 안에서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주체적으로 예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맡겨진 말씀 교육과 복음 전파의 사명을 두려움 없이 감당하며, 자기가 받았던 그 사랑 그대로 또 다른 영적 제자를 찾아 세우도록 돕는 기나긴 생명 번식의 과정입니다. 영적 리더가 공동체의 맨 앞자리에 독점적으로 오래 머물러 있는 것이 겉보기에는 교회의 안정과 평화를 보장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때로 복음이 가진 야성적인 확산과 하나님 나라의 건강한 폭발력은 리더가 가진 거룩한 책임과 권한을 다음 세대에게 과감히 위임하는 영적 용기와 자기 부인에서부터 시작되는 법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사역의 현장 속에서,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 경험하는 ‘첫사랑의 뜨거운 감격’과 영혼을 굳건하게 다져주는 ‘정밀한 신학 교육’은 결코 서로 대립하거나 충돌하는 모순 관계가 아닙니다. 복음의 감격을 갓 체험한 초신자가 가슴속에 품고 있는 뜨거운 영적 열정과 불타는 가슴은, 세상 사람들을 향해 예수를 증언하게 만드는 가장 고귀하고 파괴력 있는 선교의 동력이 됩니다. 그러나 그 타오르는 복음의 불길이 일시적인 감정의 소모로 끝나지 않고 평생을 헌신하는 거룩한 모닥불로 오래도록 타오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라는 깊은 심지와 정통 교리의 견고한 중심 뼈대가 반드시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강해 설교는 그리스도께로 돌아온 영혼들이 전도된 그 순간부터 삶의 현장에서 복음의 기쁨을 담대히 나누고 가르치도록 영적으로 끊임없이 격려하되, 동시에 그 열정이 이단 사설이나 주관적인 감상주의에 빠져 침몰하지 않도록 교회 공동체 차원의 체계적인 성경 양육과 역사적으로 검증된 신앙의 신학적 토대를 반드시 구축해 주어야 한다고 못을 박습니다. 주님의 복음은 들불처럼 전 세계를 향해 가장 빠르게 전파되어야 마땅하지만, 진리의 깊이가 깊지 못해 사탄의 유혹 앞에 얕게 흩어져 사라지는 비극을 겪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바바나가 보여준 사심 없는 은혜의 태도는 화려한 대형화와 자기 과시에 도취해 있는 오늘의 현대 교회들을 향해 거룩하고도 침통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지금 내 눈앞에 있는 한 사람의 영혼을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자로 키워내는 영적 해산의 수고보다, 내가 가진 기득권과 종교적 자리를 사수하는 일에 더 익숙해져 버린 기득권자가 아닌가? 나를 통해 맺혀진 수많은 복음의 화려한 사역적 열매와 명성을 은밀하게 내 이름과 업적 아래 묶어두고 독점하려는 영적 탐욕은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지 않은가?” 참된 선교적 공동체는 나의 종교적 영향력과 영토가 확장되는 세속적 성공보다, 내가 키운 다음 세대의 영적 제자들이 나보다 훨씬 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거룩하게 성숙해 가고 주님의 나라를 위해 위대하게 쓰임받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을 최고의 영광이자 천국의 기쁨으로 삼는 자들입니다. 바나바의 심장을 가진 아비의 기도를 통해 그렇게 우뚝 세워진 영적 제자는, 머지않아 자기가 받은 대로 또 다른 사람을 살려내는 아비가 될 것이며, 한 지역에 임했던 성령의 뜨거운 은혜의 강물은 둑을 넘어 또 다른 영적 불모지의 소망의 바다로 번져 나가게 될 것입니다.
4. 루스드라의 돌팔매질 속에서 정제되는 믿음과 거룩한 도피의 지혜
사도행전 14장의 말씀은 인간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영예인 ‘하늘의 기적’과, 인간이 가할 수 있는 최악의 폭력인 ‘피비린내 나는 핍박’을 단 하나의 극적인 사건 공간 안에 배치하여 우리에게 전율을 선사합니다. 나면서부터 단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던 루스드라의 앉은뱅이가 사도 바울이 선포한 예수의 이름 권세 앞에서 벌떡 일어나는 초자연적인 치유 표적이 나타나자, 흥분한 루스드라의 군중들은 이성을 잃고 바나바를 신들의 왕인 ‘제우스’로, 바울을 신들의 대변자인 ‘헤르메스’라 부르며 그들 앞에 소를 잡고 제사를 지내며 신처럼 숭배하고 높이려 광분했습니다. 그러나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안디옥과 이코니온에서 원정 온 악한 유대인 선동가들의 사악한 감언이설에 휘말린 똑같은 무리들은, 금세 태도를 바꾸어 돌을 들어 바울을 향해 사정없이 무차별 돌팔매질을 가했고 피투성이가 되어 숨이 끊어진 줄로 생각한 바울의 몸뚱이를 쓰레기처럼 성 밖에 내던져 버렸습니다. 인간들의 열렬한 환호성과 잔인한 살인 폭력이 이토록 한 뼘도 되지 않는 지척의 거리에 함께 공존한다는 사실은, 십자가 복음의 길이 결코 세상이 말하는 평탄한 성공담이나 번영신학의 영웅 소설이 아님을 뼈저리게 폭로합니다. 그리스도의 피 묻은 복음이 전진하는 거룩한 현장에는, 언제나 세상의 무지한 오해와 공중 권세 잡은 사탄의 가혹한 반발, 그리고 성도의 중심을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환난이 필연적으로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설교는 복음의 발걸음을 가로막는 이 혹독한 환난과 핍박을 결코 선교의 실패나 하나님의 부재를 알리는 좌절의 표지로 읽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4장 22절에서 사도 바울이 피투성이가 된 몸을 일으켜 성도들에게 선포했던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는 이 장엄한 말씀은, 성도가 겪는 삶의 고난을 위선적으로 낭만화하거나 미화하는 공허한 문장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승리의 길은 결코 이 타락한 세상의 박수갈채와 인정만으로는 결코 열리지 않으며 오직 십자가의 좁은 문을 통과해야만 한다는 우주적인 엄속한 진리의 선언입니다. 바울은 돌에 맞아 죽은 시체처럼 차가운 땅바닥에 버려졌으나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생명력으로 다시 일어났으며, 놀랍게도 자신에게 돌을 던져 죽이려 했던 바로 그 공포의 루스드라 성내로 다시 제 발로 걸어 들어가 낙심해 있던 제자들의 마음을 말씀으로 위로하고 교회를 굳건하게 추슬렀습니다. 참된 기독교 신앙은 내 삶에 아무런 고통과 문제가 없을 때만 일시적으로 타오르는 주관적인 감정의 유희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방에서 죽음의 돌멩이가 날아와 내 온몸이 찢기는 비참한 처지 속에서도, 나를 위해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다시 바라보는 영혼의 깊은 뿌리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깊이 있는 설교가 성경의 진리를 오해하여 인간의 무모한 영웅주의나 만용을 ‘대단한 믿음’인 양 믿음의 이름으로 포장하지는 않습니다. 과거 주님께서 제자들을 선교 현장으로 파송하시며 말씀하셨던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도망하라”는 마태복음의 교훈처럼, 박해를 피할 수 있는 지혜로운 상황에서는 무모하게 목숨을 버리지 않고 인도하심을 따라 몸을 피하는 거룩한 우회와 지혜 역시 주님의 뜻에 온전히 굴복하는 순종의 매우 중요한 일부입니다.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핍박을 피해 도망치는 그 처절한 도피의 여정 중에도, 내 가슴속에 타오르는 복음의 불씨와 사명의 정체성을 결코 손에서 놓지 않는 신실함입니다. 때로는 대적들의 칼날을 피해 지혜롭게 선교지를 떠나는 것이 하나님의 세밀한 지혜일 수 있고, 또 때로는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고통받는 성도들을 지키기 위해 죽음의 현장으로 다시 걸어 들어가는 것이 복음의 뜨거운 사랑일 수 있습니다. 감당하기 힘든 환난이 폭풍처럼 교회를 덮칠 때 우리 성도들이 배워야 할 것은 사탄이 주는 마비되는 공포가 아니라,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분별해 내는 영적 분별력이며, 그 위대한 분별력은 어떠한 극한 상황 속에서도 나를 눈동자처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길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의 깊이에서만 자라나는 법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섭리 속에 허락된 환난은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교회의 내면세계의 실상을 현미경처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영적 시금석이 됩니다. 모든 상황이 평탄하고 형통할 때는 거룩함과 경건의 모양 뒤에 교묘하게 감추어져 있던 인간에 대한 불건전한 의존성, 영적인 허약함, 그리고 끊임없이 세상의 물질과 권력의 인정에 기생하여 안정을 누리려 했던 성도의 속물근성들이 극심한 고난의 용광로 속에서 비로소 그 추악한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 위기의 순간에 교회 공동체는 모세와 하나님을 향해 거칠게 원망을 쏟아내던 광야의 이스라엘처럼 멸망의 길로 퇴보할 수도 있고, 반대로 가슴을 찢는 철저한 성경 묵상과 통회의 회개를 통해 오직 여호와 한 분만을 나의 유일한 반석으로 삼는 거룩한 부흥의 자리로 전진할 수도 있습니다. 강해 설교가 우리에게 닥친 모든 삶의 고난을 세속적인 관점을 버리고 철저히 성경적·신학적인 안목으로 다시 읽어내야 한다고 강력히 촉구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도가 당하는 고난은 사탄이 우리의 손에서 복음의 보화를 빼앗아 가기 위해 가하는 폭력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복음 외에 음란하게 붙들고 의지하고 있던 세상의 모든 가짜 우상들을 내 손에서 강제로 내려놓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가장 거칠고도 아픈 변장 된 은혜의 손길인 것입니다.
5. 인간의 영광을 찢는 옷과 교회의 진정한 소유권을 향한 고백
이 위대한 설교의 종착역은 공동체의 모든 영광과 찬사, 그리고 교회의 절대적인 주권을 본래의 주인이신 전능하신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려놓는 장엄한 신앙 고백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루스드라의 무리들로부터 신적인 존재로 추앙받으며 세상의 모든 영광과 제물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었던 권력의 정점의 순간에, 도리어 자신들의 옷을 거칠게 찢으며 무리들 속으로 뛰어 들어가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에 불과하다”라며 고함을 지르고 만류했던 사도들의 눈물겨운 장면은, 교회의 사역 가운데 아무리 위대한 하늘의 표적이 나타나고 폭발적인 부흥의 열매가 맺힌다 할지라도 그 모든 영광의 빛은 인간 지도자에게 단 1%도 머물 수 없음을 보여주는 기독교의 가장 준엄한 영적 질서입니다. 지상의 교회는 하나님의 사역을 대리할 탁월한 리더와 지도자를 반드시 필요로 하지만, 그 인간 지도자를 교회의 중심 왕좌에 세우고 우상화하는 그 비참한 순간에, 교회는 복음이 가진 거룩한 하늘의 질서를 통째로 상실하고 세속적인 사교 집단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 지도자의 이름을 화려하게 장식해 주는 장식품의 조명이 결코 아니며, 오직 모든 피조물의 시선을 홀로 영광 받으셔야 할 창조주 하나님 한 분에게로만 향하게 만드는 거룩한 나침반이어야 합니다.
결국 복음 안에서 흐르는 참된 자유와 교회의 신성한 질서, 영혼을 구원하는 세계 선교와 말씀을 심는 정밀한 양육, 그리고 육체를 짓누르는 극심한 환난과 하늘의 신성한 소망은 서로 제각기 떨어진 독립된 신학 주제들이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심장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유기적인 보혈의 생명력입니다. 복음의 자유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 안에서 비로소 거룩한 질서라는 든둑을 만나 은혜의 강물로 안전하게 흐르게 되고, 교회의 세계 선교는 끊임없이 다음 세대의 제자들을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세워 위임하는 사랑의 수고를 통해 세대를 넘어 지속되며, 성도의 환난은 인간의 교만과 세상의 온갖 불순물들을 깨끗하게 정제하여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더 선명하고 맑은 눈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소망의 뿌리가 됩니다.
그리고 이 거룩한 영적 순환의 중심에는, 언제나 나의 교만과 실수를 눈물로 가슴 치며 돌이키는 낮고 조용한 통회의 회개의 자리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지상의 교회가 복음의 야성을 상실한 채 세상의 물질과 대형화의 인정에 음란하게 기대어 서거나, 인간 지도자의 지혜와 자금의 힘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사사로이 소유하여 휘두르려 할 때마다, 우리는 성경 앞으로 돌아가 우리의 전율하는 심장을 향해 이 본질적인 질문을 거칠게 던져야 합니다. “이 피로 사신 교회 공동체는 과연 누구의 것인가? 인간 리더의 것인가, 아니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것인가?”
그리스도가 선사하신 복음의 진정한 자유는, 나 혼자 영적인 고지에 올라가 타인을 내려다보며 고고하게 높아지는 독선과 교만의 외길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의 거룩한 법안에서 모든 지체가 서로를 나보다 낫게 여기며 한 걸음씩 발을 맞춰 함께 질서 정연하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세워져 가는 사랑의 동행입니다.
이 거룩한 대선언이 우리에게 남기는 웅장한 영적 울림은, 단순히 교회를 행정적으로 운영하는 목회적 원칙의 수준을 가볍게 뛰어넘어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 개개인의 지극히 평범하고 고단한 일상의 삶의 자리 한복판으로 엄위하게 걸어 들어옵니다. 우리는 날마다 입술로는 은혜의 자유를 쉽게 떠들면서도 정작 그 자유가 요구하는 형제를 향한 희생적인 사랑의 책임과 절제는 너무나 쉽게 망각해 버리고, 반대로 공동체의 행정적 질서와 정통 교리를 소리 높여 주장하면서도 정작 그 제도를 뚫고 역사하시는 성령의 새롭고 역동적인 바람은 무지함과 두려움으로 거부하는 이중적인 모순을 범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압도적인 은혜가 타락한 우리를 다시금 거룩하신 말씀의 거울 앞으로 겸손히 불러 세우실 때, 세상 유혹에 사방으로 분산되어 거칠게 흩어졌던 우리의 메마른 심령은 비로소 십자가의 순종의 자리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요하게 영적 정돈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눈물겨운 지상 교회가 세상을 향해 붙들고 선포해야 할 하늘의 진짜 소망은, 세상의 기업들을 흉내 내는 화려하고 시끄러운 마케팅적인 성공의 언어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등에 지고 묵묵히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지극히 낮고 꾸준한 순종의 언어, 바로 그것입니다. 복음의 은혜로 진정한 영혼의 자유를 얻은 성도가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의 질서를 배우고, 그렇게 진리로 견고하게 세워진 제자가 자기 곁에 있는 또 다른 연약한 영혼을 예수의 제자로 사랑으로 키워내며, 날아오는 세상의 돌팔매질과 환난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부활의 소망으로 다시 툭툭 털고 일어나는 바로 그 거룩한 눈물의 자리에서, 교회는 마침내 이 땅의 어둠을 뚫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찬란한 윤곽을 세상 앞에 조용히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거룩한 아침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복음의 자유는 과연 내 곁에 있는 상처 입은 누구의 영혼을 살려내기 위해 쓰이고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소리 높여 사수하고자 하는 교회의 모든 신앙적 질서와 정통 교리는, 과연 살아 숨 쉬는 성령의 거룩한 숨결과 아가페의 사랑을 온전히 살려내는 생명의 방둑이 되어 주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