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십자가 묵상 – 장재형목사

장재형(장다윗) 목사는 요한복음 13장의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사랑, 그리고 제자들을 향한 섬김에 대해 깊이 묵상해야 함을 여러 차례 강조해 왔다. 특히 사순절 기간에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더욱 가까이 대하며, 그 고난이 왜 사랑인지를 깨닫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요한복음 13장 1절의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라는 구절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의 사역을 마무리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베푸신 ‘끝까지 사랑하시는’ 모습의 출발점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장면에서 예수님이 보이신 태도와 사랑의 실천이 곧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요구되는 제자도의 핵심이라고 가르치는데, 이를 따라가 보면 예수님께서 왜 끝까지 사랑하신 것인지, 그리고 그 사랑은 무엇을 담고 있는지 자연스레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고난이며, 그 고난이 곧 십자가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은,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낮아지고 섬김의 자리에 서셨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사랑을 통해 우리에게 ‘사랑이 결코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며 생명을 얻게 하는 길’이라는 진리가 선포된다. 사도 바울이 말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는 말씀처럼, 사랑이야말로 모든 것을 완성하는 열쇠이며, 이 사랑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요한복음 13장부터 이어지는 19장까지의 기록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로 들어서시기 전 어떤 마음가짐과 태도를 지니셨고, 어떻게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돌보셨으며, 결국 어떤 결단으로 순종하셨는지를 자세히 알 수 있다고 한다. 요한복음 13장에서부터 예수님의 고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지만, 그 시작점에는 언제나 사랑이 놓여 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라는 선언은, 예수님이 왜 고난을 피하지 않으셨는가에 대한 분명한 답이 된다는 것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끝까지 사랑하기 때문에 고난을 자처하셨고, 그것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음을 몸소 보여주셨다. 장재형 목사는 이 사실이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때로는 고난을 저주나 형벌로만 여기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징계’로만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고난 속에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섭리가 깃들어 있으며, 그것이 결국 우리를 더 성숙하고 거룩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성경 여러 곳에는 고난의 유익함과 고난에 참여해야 함을 수차례 말한다. 예를 들어 시편 119편에서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하여, 고난이 오히려 영적 성장을 이끈다고 고백한다. 또 로마서 5장 3-11절의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는 바울의 고백은,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고자 하는 열망을 드러낸다. 골로새서 1장 24절의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나 디모데후서 1장 8절의“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디모데후서 2장 3절의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그리고 베드로전서 2장 20~21절, 4장 13절 등에 걸쳐서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라는 명령이 여러 번 나온다. 이러한 말씀들은 모두 고난이 결코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쁘게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그리스도의 길을 배우고 따라야 한다는 중요한 영적 진리를 제시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을 토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요한복음 13장 사건이야말로 ‘사랑 안에 담긴 고난’의 대표적 예시라고 설명한다. 우리가 흔히 사랑을 말하지만, 사랑은 결코 말로만 완성되지 않는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것, 상대가 마땅히 받아야 할 나의 섬김을 기꺼이 감당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던 그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이것은 그 시절 문화에서 종이 주인과 손님들의 발을 씻겨 주는 모습과 동일한 행동이었고, 철저히 ‘낮은 자리에서의 봉사’를 의미한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 이전에 서로 다투고 있었다.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의견 충돌을 일으켰고, 심지어 어떤 제자는 주님의 나라에서 우편과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요청하기까지 했다. 그 말은 곧 ‘내가 남보다 높임을 받고 싶다’는 염원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장재형 목사는 “이처럼 제자들이 세상의 가치관을 가지고 높아지려고 했기에, 예수님은 거꾸로 가장 낮은 자리에 서심으로써 제자들에게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의 법칙을 몸소 보여 주셨다”라고 설명한다.

주님께서 보여 주신 하나님의 나라 법칙은 세상의 가치관과 철저히 반대된다. 세상은 ‘더 높은 자리, 더 많은 권력, 더 큰 명예’를 추구하지만, 예수님은 ‘더 낮은 자리, 더 적은 권력, 더 작은 모습’으로 섬기라고 가르치신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 20:26~27)는 말씀에서 예수님은 새로운 질서를 선포하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라는 것, 그리고 그 섬김은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는 데까지 이른다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섬김의 길은 결코 쉽지 않으며, 그것은 곧 자아의 죽음과 고난을 동반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가 그 길을 따라갈 때 비로소 참 생명, 참 기쁨, 부활의 능력을 경험한다. 세상의 논리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내려가는 길이 곧 올라가는 길이 되는 모순이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는 진정으로 성립된다.

요한복음 13장 전체의 흐름을 살펴보면, 예수님은 자신에게 닥친 십자가의 운명을 이미 아셨다. 장재형 목사는 “예수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요 13:1)라는 말씀은, 이제 곧 참혹한 고난과 죽음의 시간을 시작하실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계셨다는 점을 시사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끝까지라는 표현에는 ‘완전히, 철저히, 영원히’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는 단지 순간적인 감정이나 일시적인 돌봄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내어주기까지 확고히 진행되는 사랑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사실이야말로 크리스천 삶의 핵심이라 역설한다. 우리에게 고난이 닥칠 때, 우리는 흔히 자신에게만 몰두하게 된다. 내 걱정, 내 상황, 내 문제에 갇혀 타인을 돌볼 여유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이 눈앞에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제자들을 모으시고 마지막 만찬을 베푸시며, 그들을 가르치시고 위로하시고 섬기셨다. 이것이 참 사랑이고,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습이다.

그 사랑의 정점이 발을 씻기시는 사건으로 드러난다. 당시 팔레스타인의 길은 대부분 포장되지 않은 흙길이었고, 신발이라고 해 봐야 오늘날의 샌들 정도에 불과했거나, 더 가난한 사람들은 거의 맨발로 다녔다. 하루 종일 먼지길을 다니면 발이 더러워지기 마련이기에, 집에 돌아오면 물로 씻어내는 풍습이 있었다. 만약 누군가가 저녁 식사에 초대되었다면, 종은 그 손님의 발을 씻겨 주며 환대의 표시를 했다. 그러나 최후의 만찬 자리, 그것도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나누시는 성스럽고 중요한 순간에, 제자들은 서로 “누가 더 높으냐”를 다투느라, 아무도 발 씻기는 종의 역할을 맡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친히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 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는 예수님이 말로만 섬김을 외치지 않으셨음을 극명히 보여 주는 사건”이라며,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바가 실제 삶에 어떻게 구현되는지 직접 시범을 보이신 것으로 해석한다. 주님의 삶은 곧 말씀 그 자체였고, 그 말씀이 행동이 되어 드러나는 모습은 우리가 계속 묵상하고 본받아야 할 제자도의 정수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설교하고, 섬김을 가르치고, 나눔을 외치지만, 실제로는 그 삶을 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신 그대로 행동하셨고, 심지어 죽음의 문턱에서도 타인을 섬기는 모습으로 자신을 내어주셨다. 이것이 십자가에 이르는 길이었고, 동시에 사랑의 길이었다. 우리가 이 사랑의 길을 더욱 깊이 묵상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사실을, 장재형 목사는 사순절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 전반에서 놓쳐선 안 된다고 수차례 강조한다.

이처럼 사랑은 곧 고난을 동반한다. 단순히 아름다운 감정이나 영화에서 그리는 낭만적 요소가 아니라, 나를 철저히 낮추고 상대를 높이기 위해 치르는 희생적 행위가 사랑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위엄과 권리를 주장하셨다면, 제자들의 발을 씻길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로 종의 자리로 내려오셨다. 그 결과, 제자들은 말로만 들었던 예수님의 가르침을 눈으로 직접 보게 되었고, 참 섬김의 의미를 체득하게 되었다. 장재형 목사는 우리가 이 사건을 통째로 오늘날 교회와 신앙 공동체의 삶에 적용해야 함을 역설한다. 교회 안에서도 직분과 역할, 나이와 사회적 지위, 혹은 재정적 조건 등에 따라 교만함이 생기고, 섬김받고자 하는 마음이 커진다면, 결코 주님이 원하시는 공동체를 이룰 수 없다. 서로 높아지려고 하던 제자들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예수님의 행동을 기억하고 따라감으로써, 서로의 발을 씻겨 줄 수 있는 순수한 교제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은 결국 영향받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상대가 어떻게 반응하든, 심지어 자신을 배신하거나 오해하더라도 끝까지 책임지는 것이 사랑이다. 요한복음 13장을 살펴보면,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자신을 배신할 것을 이미 알고 계셨음에도 그의 발도 씻기셨다. 이는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결정이지만, 예수님은 그런 길을 택하셨다. 장재형 목사는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역설”이라고 부르는데, 세상에서는 보복과 증오, 상처의 반복이 자연스럽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오히려 은혜와 용서, 자기희생과 사랑이 흘러넘친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3~14)고 말씀하셨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라’라는 명령이 곧 교회 공동체와 성도들이 일상에서 실천해야 할 핵심이라 주장한다. 그것은 곧 ‘제자가 제자에게, 형제가 형제에게, 서로 섬기는 삶’이며, 그 섬김 속에서 예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랑은 놀랍도록 많은 희생을 요구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크고자 하는 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곧 섬기는 자요 종이 되어야 한다는 이 역설은, 인간 본성이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높임받고 인정받길 원하고,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위치에 오르고자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한다”(마 20:26)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따른다면, 세상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뜻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것을 ‘가치관의 종말’이라고 표현한다. 옛사람의 가치관이 온전히 끝나고, 새사람의 가치관이 시작되어야만,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의 눈으로 높다고 생각하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가치 있는 삶의 자리를 선택하는 것이며, 그 선택이 바로 고난의 길이고 동시에 축복의 길이다.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최후의 만찬에서 떡과 포도주를 나누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 22:19)고 말씀하셨다. 장재형 목사는 이 장면을 두고, 예수님의 자기희생이 단순히 이론적 교리나 교훈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사건임을 명심해야 한다고 말한다. 떡은 예수님의 몸을 의미하고,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를 상징한다.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그리고 인류 구원을 위해 실제로 몸을 찢기고 피를 흘리셨다는 사실을 기념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엄숙한 순간에도 제자들은 자신의 권리나 지위를 고민했고, 서로 누가 더 큰 자인가를 놓고 다투었다. 이는 그들이 주님의 고난과 희생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음을 잘 보여 주는 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고, 마지막까지 가르치고 제자리에 세워 주셨다. 장재형 목사는 제자들을 이런 식으로 마지막까지 붙드신 예수님의 사랑을 보며, 우리도 비록 연약하고 부족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거듭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교회는 고난에 대해 온전히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다고 장재형 목사는 힘주어 말한다. 많은 성도들이 여전히 고난을‘하나님이 버리시는 것’ 또는 ‘하나님의 형벌’로만 오해하고 있는데, 성경의 다양한 본문이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시각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셨듯이, 우리 또한 고난을 통해 신앙을 정금같이 연단받고, 사랑을 더 깊이 배우며,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길을 걷게 된다. 바울의 수많은 서신과 베드로의 권면은, 고난이 오히려 우리의 기쁨이 될 수 있고, 그 고난 속에서 우리가 참된 소망을 발견한다고 선언한다. 장재형 목사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에 참여하고, 그 부활의 권능에도 참여하게 되는 것이야말로 믿음의 궁극적 열매”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다.

요한복음 13장을 다시 보면, 예수님께서 비참한 십자가로 향하는 길을 시작하실 무렵,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보여 주신 모습이 발을 씻기시는 사건이었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다. 주님은 “이제 내가 너희를 떠나 아버지께로 갈 시간이 되었고, 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이다”라는 사실을 아셨지만, 그럼에도 제자들을 향해 최후의 만찬을 준비하시고, 그들의 발을 씻기셨다. 이는 스스로 종이 되어 ‘사랑의 본’을 보이시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에서 “예수님께는 절박한 순간일수록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자들을 일깨우고 영적으로 세우시는 데까지 이르는 사랑이 있음을 알 수 있다”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우리도 삶의 고난이나 역경이 깊어질수록 자기 연민이나 불평으로 빠지기보다, 오히려 우리 곁에 있는 이들을 돌아보고 섬길 수 있는 믿음과 결단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더 나아가, 제자들이 발을 씻기는 모습을 제각각 반응한 것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베드로는 “주여, 제 발을 절대 씻기지 못하실 것입니다”라고 외쳤다가,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고 하시자, 곧바로“주여, 제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십시오”라고 말한다(요 13:8~9). 여기서 예수님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시며, 영적으로 이미 깨끗해진 제자라도 매일의 삶에서 묻어 나는 죄나 잘못을 씻는 일이 필요함을 암시하셨다. 장재형 목사는 이 부분을 두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았을지라도, 매일 발이 더러워지는 것처럼 죄에 물들 수 있으므로, 날마다 회개하고 씻음을 받아야 한다는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그 회개의 과정 역시, 서로가 서로를 섬기고 사랑하는 공동체 안에서 일어날 때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고 덧붙인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사건이 끝나고,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라고 물으셨다(요 13:12). 장재형 목사는 예수님의 이 질문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던져지고 있다고 본다. “정말 예수님이 하신 일을 알고 있는가? 그 섬김과 사랑, 그리고 십자가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고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알아야 행동할 수 있고, 깨달아야 그것을 전할 수 있다. 그래서 장재형 목사는 교회가 이런 본질을 놓치고, 프로그램이나 조직 운영, 숫자적 성장만을 추구한다면, ‘예수님이 행하신 것’을 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예수님의 발씻김 사건은 단순히 한 번의 자비로운 행동이 아니라, 제자도를 정의하는 상징이자, 교회 공동체의 존재 이유를 선포하는 예표다. 즉,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는 새 계명의 기반을 보여 주는 구체적 모델인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발씻김 뒤에 제자들에게 향해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라”고 명하셨다(요 13:15). 장재형목사는 이 명령의 어조가 매우 단호함을 강조한다. 예수님은 이것이 선택사항이나 권고사항이 아니라, 제자라면 반드시 순종해야 할 명령으로 주셨다는 것이다. 사랑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며, 섬김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다. 그래서 교회는 서로의 발을 씻어 줌으로써 예수님의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야 하고, 그를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되어야 한다는 것이 장재형목사의 핵심 가르침이다. 결국 사랑과 고난은 불가분의 관계다. 남을 섬기려면 내가 희생해야 하고, 남을 높이려면 내가 낮아져야 한다. 남의 죄와 허물을 덮어 주려면, 내가 먼저 이해하고 인내해야 한다. 그 과정이 때로는 아프고 어려우며, 우리의 자아를 꾸준히 깨뜨려야 한다. 그러나 그 길이 곧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이며, 십자가로 이어지는 길이다.

이처럼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과 발씻김 사건이 가진 의미를 통합적으로 볼 때,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보다 명확히 알게 된다. 사랑은 결코 감정적 즐거움이나 단순 호의 이상의 것이다. 사랑은 헌신과 희생을 전제하며, 때로는 배신과 오해까지 감수하는 행위다. 예수님께서 끝까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누군가를 끝까지 사랑할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고장재형 목사는 말한다. 물론 인간적인 의지나 능력만으로는 불가능하며,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그 길을 결심하고 걸어갈 때, 예수님의 영이 우리 안에 역사하시며, 그 길을 완주할 수 있도록 인도하신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된다는 것은, 곧 이 사랑의 실천을 통해 증명되는 것이다.

또한, 장재형 목사는 우리가 고난을 두려워하거나 외면하기만 한다면, 결코 이런 사랑의 성숙에 이를 수 없음을 지적한다. 고난은 결국 내가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도구가 되기도 하고, 동시에 그 사랑을 더 정결하게 만드는 불길이 되기도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로 나아가는 길에는 제자들의 배신,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의 모함, 군병들의 조롱과 채찍질, 그리고 처절한 고통이 연이어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상황은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는 말씀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 주는 장치였다. 사랑이 없었다면 예수님은 결코 십자가를 선택하지 않으셨을 것이나, 사랑이 있었기에 그 고난을 기꺼이 받으시며 우리를 구원하셨다. 이는 교회와 성도들이 세상 가운데 부르심을 받은 이유와도 맞닿아 있다. 세상이 미워하고 배척해도,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의 사랑이 그 고난을 극복하도록 힘주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는 말씀에는 소극적 의미 이상으로 적극적 의미가 있다는 점이다. 예수님은 단지 제자들을 체념적으로 ‘포기하지 않으셨다’가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끝까지 돌보셨다’는 의미를 갖는다. 최후의 만찬 이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도, 예수님은 제자들의 연약함을 염려하시며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으라”고 당부하셨다. 장재형 목사는 이 당부 역시 ‘사랑의 끝까지 감’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주님은 자신이 걸어가야 할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제자들의 영혼 상태와 실족하지 않도록 경고하고 세우시는 일에 집중하셨다. 이것이 사랑의 최종적 모습이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가 한계를 느낄 때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외치며 사랑을 멈추지 않았던 주님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

장재형 목사는, 발씻김 사건 직후 예수님께서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선언하신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요13:21). 즉, 사랑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 뒤에 배신의 예고가 이어진다. 우리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역설적 상황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사실을 아시고서도 사랑을 거두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발씻김 속에는 유다도 포함되었을 터이니, 결과적으로 예수님은 자신을 배신할 자의 발도 직접 씻겨 주신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것이야말로 인간적 계산이나 정서를 완전히 초월한 신적 사랑의 본질”이라 강조한다. 사람이라면, 나를 배신할 자를 미리 알고 있다면 결코 가만히 두지 않거나, 최소한 좋게 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배신을 막지 않으셨고, 유다에게 최후까지 은혜를 베푸셨다. 결국 배신의 결과는 유다가 스스로 짊어져야 할 몫이 되었으나, 적어도 예수님의 사랑 안에는 그를 향한 문이 닫혀 있지 않았던 셈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끝까지 사랑하시는’ 모습의 구체적이고도 고통스러운 현실이다.

사랑이 고난을 동반하기에, 교회가 고난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사랑의 본질도 잃어버린다고 장재형 목사는 경고한다. 만약 교회가 고난 없이 잘되는 것, 형통만을 강조한다면, 예수님이 보여 주신 진정한 십자가의 길과는 거리가 멀어지기 쉽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있을 수 없고, 고난 없는 영광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순절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고, 그 고난 속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을 되새기며, 우리 또한 그 사랑을 본받아 살아가도록 결단하는 기간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결단은 사순절에 한정되지 않고, 부활 이후에도 교회가 지속해서 실천해야 할 과제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의 사명이 “그 사랑을 세상에 알리는 것, 고난을 겪는 모든 이에게 예수님의 섬김과 희생을 전하는 것”이라 가르친다.

요한복음 13장 1절의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지상 사역의 마지막 국면을 여는 서곡이자, 그 모든 고난의 과정을 설명해 주는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하시며,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새 계명을 주시고, 이어서 잡히시고, 고난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다. 이 모든 흐름은 사랑이라는 큰 줄기로 관통된다. 장재형 목사는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끝까지 사랑함으로써 고난마저도 껴안고, 그 고난 속에서 부활의 영광을 소망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임을 역설한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7장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제자들을 위해 간구하시며, “저희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 심지어 예수님은 자신을 체포하러 온 이들을 직접 향해 “내가 그니라”고 밝히시며 저항하지 않으셨다. 그만큼 철저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고, 사랑으로 행하셨다. 제자들의 배신과 흩어짐을 알면서도, 그들을 다시 회복시킬 것을 기대하시는 마음이 엿보인다.

장재형 목사는 오늘날 교회와 성도가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우리도 결국 이 길을 따라가야 한다는 자각이 일어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만약 예수님을 선생이라, 주님이라 부른다면, 우리도 서로 발을 씻겨 주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새기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직분이 높다고 섬김을 받으려 하거나, 세상의 권세와 돈, 명예에 집착한다면, 결코 주님의 제자로서 성숙할 수 없다. 예수님이 보여 주신 섬김의 본은 누구나 실천하기엔 어렵지만,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랑은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고, 그 몫을 통해 주님의 영광이 나타난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각자 맡은 자리에서 주님의 발씻김을 다시금 재현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는 것이다.

제자들이 누가 더 크냐고 다투었던 마태복음 20장이나 누가복음 22장에서 예수님은 “이방인의 집권자들은 사람을 주관하고 권세를 부리지만, 너희는 그렇지 않아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는 오늘날 교회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섬김을 통해서 참된 리더십을 보이셨다면, 교회 지도자든 성도든 모두가 섬김의 자세를 가져야 마땅하다. 장재형목사는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이야말로, 교회의 영적 질서를 바로 세우는 기준이라고 역설한다. 그 질서가 제대로 서 있을 때, 교회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빛을 발하게 된다. 서로 높아지고자 하는 세계가 아니라, 서로 낮아지고자 하는 공동체가 된다. 그리고 그런 공동체를 통해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진실하다’는 사실을 체험적으로 깨닫게 된다.

장재형 목사가 요한복음 13장을 근거로 제시하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고, 그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셨으며, 그 과정에서 고난을 결코 피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고난을 사랑으로 견디시고, 그 길을 통해 인류 구원을 이루셨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받았다면, 동일하게 사랑의 길, 섬김의 길,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하며, 그 길에서 나타나는 영광은 결국 부활과 같은 참된 기쁨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비록 당장은 우리도 제자들처럼 ‘누가 크냐’는 다툼에 빠질 수 있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깨닫지 못할 때가 많겠지만,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여전히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며, 말씀과 성령을 통해 우리를 가르치시고 이끌어 가신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사랑에 순종하고, 실제 생활 속에서 서로 발을 씻겨 주는 실천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교회의 본질이고, 우리가 계속 추구해야 할 가치다.

사순절 동안의 묵상뿐 아니라 일상 속의 모든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사랑, 그리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섬김을 되새길 때, 우리는 우리의 잘못된 가치관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나라 가치관으로 다시금 재무장해야 한다. 세상은 여전히 힘, 물질, 명예를 최고로 여기지만,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버려 우리를 사셨고, 종의 모습으로 살다 가셨으며, 부활의 영광으로 그것이 진리임을 입증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남을 높이는 데 힘쓰고, 다른 사람들의 발을 씻겨 줄 수 있는 종의 마음으로 살아갈 때, 비로소 예수님의 제자라고 불릴 자격이 생긴다. 장재형 목사는 “그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의 죄를 씻음 받았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씻음 받은 은혜를 매일 새롭게 감사하며, 다른 이들을 향해 기꺼이 섬김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교회 안에서는 더 이상 ‘누가 크냐’는 다툼이 아닌, 서로를 높이고 격려하는 아름다운 교제가 일어나고, 그 모습을 통해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이 진정 살아계신 주님이심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13장의 핵심 구절인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고난이 시작되는 서곡인 동시에, 제자들의 발 씻기 사건과 함께 ‘사랑의 가장 진한 표현’을 보여 주는 장면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교회 역사 2천 년 동안 수많은 성도와 교회에 의해 되풀이해 읽혀 오며, 가르쳐지고, 실천되었다. 장재형 목사는 이 장면이야말로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복음의 정수이며, 교회의 존재 이유 그 자체라고 말한다. 우리가 사순절뿐 아니라 매일매일 이 장면을 묵상한다면, 우리도 예수님의 사랑과 섬김을 본받아 서로의 발을 씻겨 줄 수 있는 준비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작은 헌신과 고난의 짐을 나누는 사랑이 모여, 교회는 주님의 몸으로 온전한 기능을 감당하고, 세상은 그리스도의 빛으로 점차 변화될 수 있다. 예수님이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끝까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궁극적 소명이며, 복음이 지닌 놀라운 능력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는 삶, 섬기되 종의 모습으로 섬기는 삶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요구되는 참된 순종이며,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미리 맛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질 천국에서, 예수님이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해 주실 순간의 예고편이 된다고 장재형 목사는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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