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장다윗)목사가 사도행전 20장의 말씀을 통해 전하는 핵심적 가르침은 바울이 드로아에서부터 앗소를 거쳐 밀레도에 이르기까지 걸어가는 그 선교적 여정 속에서 드러나는 ‘겸손과 눈물’의 목회 정신이다. 이 정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겪는 수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결코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충성하며, 동시에 지체들을 향한 깊은 사랑을 잃지 않는 데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장재형 목사는 이 본문을 해설하면서, 바울이 소아시아 지역을 행선할 때 걸었던 길이 단순히 지리적 이동을 넘어서 깊은 영적 의미를 지닌다고 강조한다. 그 길에서 바울은 새롭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 혹은 이미 교회 안에 자리 잡았지만 여전히 연약함이 많은 공동체를 만나면서 자신의 겸손과 헌신을 몸소 보여 주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바울이 “성령에 매임받은” 상태로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분명히 깨닫고 순종했다는 사실이다.
장재형 목사는 사도행전 20장의 배경을 설명할 때, 바울이 2차 선교여행에서 들르지 못했던 지역들을 다시금 살피고, 과거에 복음을 심어 두었던 교회들을 돌아보며 권면하고 세우는 목양의 마음을 보여 준다고 말한다. 바울은 자기 곁에서 함께 사역하던 일행들을 먼저 배에 태워 보내고, 자신은 굳이 긴 거리를 걸어서 앗소까지 이동했다. 이 부분은 바울이 피조물과 대면하는 시간, 즉 땅을 밟으며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묵상하는 소중한 순간이었을 것이라고 장재형 목사는 해석한다. 인간적으로 보자면 굳이 걸어갈 필요 없이 배를 타면 편리하고 빠른 이동이 가능했을 텐데, 바울은 그 긴 거리(최소 40~50km, 당시의 도로 상황을 감안하면 훨씬 더 고된 거리)를 걸으며 스스로 하나님 앞에 더욱 겸손해지고, 이미 세워진 교회와 아직 복음을 접하지 못한 이들을 향한 절박한 마음을 다잡았을 것이다.
드로아에서의 일정부터 앗소로 걸어 내려간 장면은 바울이 가진 영적 집중력과 결단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장재형 목사는 이 본문을 토대로, 선교 사역 혹은 교회 사역이 도중에 겪게 되는 다양한 난관을 어떻게 해석하고 이겨내야 하는지를 강조한다. 사역자는 때로 고독해지고, 세상의 시선으로 보면 수고에 비해 아무런 합당한 보상을 받지 못한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바울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긴 거리를 묵묵히 걸었던 것처럼, 사역자 역시 길 위에서의 고독을 하나님 앞에 묵상하며 자기 내면을 점검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런 ‘길 위의 묵상’을 소중히 여기며, 모든 사역자와 신앙인들이 눈에 보이는 열매보다도 먼저 자신을 성령의 인도하심에 내맡기고 걸어가는 것이 진정한 믿음의 순례라고 가르친다.
이후 바울은 앗소에서 동행자들과 합류해 미둘레네, 기오, 사모를 거쳐 밀레도에 이른다. 이 일정을 기록한 누가의 문체는 매우 세밀하고 구체적이다. 장재형 목사는 누가가 의사 출신이라 기록이 꼼꼼하다는 점, 그리고 누가가 바울과 함께 ‘우리’라는 표현으로 동행했다는 점을 언급하며 사도행전이 단지 추상적인 믿음의 역사나 교리집이 아니라, 실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루어진 생생한 역사이자 선교의 여정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교회가 얼마나 소중한 순간순간을 놓치지 않고 기념하고 기록해야 하는지를 보여 준다. 교회 공동체가 보내는 선교사나 목회자, 그리고 성도들의 사역이 하루하루 어떻게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움직이는지, 그러한 기록이 쌓여 교회 역사가 되며, 훗날 후대에게 살아 있는 간증이 된다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바울이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려 한 이유를 오순절 절기를 맞추기 위함이라고 풀이한다. 바울은 절기를 지키고자 하는 유대인의 경건한 전통을 존중했다. 그 절기가 갖는 의미는 단지 일 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행사적 의미를 넘어, 예루살렘 교회와의 영적 연대감, 그리고 하나님이 정하신 거룩한 절기에 온 마음을 다하여 참여하려는 신앙적 의지였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바울의 태도에서 신앙 공동체가 함께 지키는 절기와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행사’나 ‘이벤트’로만 여겨지는 절기들이 사실은 성도들에게 영적 힘과 공동체적 결속을 제공하는 소중한 기회라는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에 들르지 않고 밀레도로 곧장 가기로 작정했지만, 정작 밀레도에 도착해서는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불러 모아 마지막 권면을 남긴다. 이는 바울이 교회를 몸소 찾아가는 대신 교회의 지도자를 불러, 더 집중적인 대화를 나누고 싶었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밀레도에서 장로들을 만나 나누는 바울의 권면은 사도행전에서 매우 중요한 장면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장면을 가리켜 ‘바울의 에베소 설교’ 또는 ‘에베소 장로들에게 준 마지막 유언’이라고 칭한다. 왜냐하면 이 짧은 말 속에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서 사역하며 보여 준 삶의 태도, 그가 전한 복음의 핵심, 그리고 교회 지도자들이 앞으로 지켜야 할 원리가 농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바울의 담화가 특별히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이 평생 묵상해야 할 모델이라고 설명한다.
바울은 먼저 자신이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어떻게 살아 왔는지를 상기시킨다. 그리고 그 핵심을 ‘모든 겸손과 눈물’이라고 요약한다. 장재형 목사는 바울이 고백한 이 두 단어가 바로 교회 봉사의 원형이라고 말한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의 태도다. 인간적인 자랑과 명예욕, 혹은 자기 과시가 아니라 끝없이 자신을 낮추어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눈물은 교우들을 향한 사랑의 표현이다. 바울은 겉으로 보면 돌을 맞고도 다시 들어가는 강인함을 지녔지만, 동시에 지체들의 연약함을 함께 아파하고 우는 사랑을 가졌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 역사를 되짚어 보아도, 참된 지도자들이 늘 이러한 겸손과 눈물을 가지고 양 떼를 돌보았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렇기에 진정한 영적 리더십은 카리스마적인 웅변이나 행정 능력에 앞서, 하나님 앞에서는 철저히 낮아지고, 사람들 앞에서는 울 줄 아는 사랑을 실천해야 함을 배운다.
또한 바울은 “유대인의 간계로 인해 당한 시험”을 강조한다. 이는 선교와 복음 전파의 길이 결코 순탄치 않았음을 보여 준다. 심한 박해와 억울한 모함, 그리고 생명의 위험까지 있었지만 바울은 그 모든 것을 인내로 참았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에서 사역자가 피할 수 없는 ‘결박과 환난’이 어떤 의미인지를 설파한다. 교회의 역사는 언제나 내부와 외부의 시험이 동시에 몰려왔고, 선교사나 지도자들은 그러한 공격 앞에서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은 여기서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며” 인내와 믿음으로 승리한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행전 20장 24절에서 고백하듯, 주님께 받은 사명 곧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기 위해서는 생명까지도 귀히 여기지 않는다. 장재형 목사는 이것이 선교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복음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일이므로, 자신의 삶을 전부 드려도 아깝지 않은 절대 가치라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어서 바울이 “너희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다시 너희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바울의 비장한 결단과 영적 통찰을 읽어 낸다. 바울은 밀레도에서 장로들을 만났을 때, 사실상 이것이 마지막 대면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죄악된 길로 치우치더라도, 자신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음을 강하게 선언한다. 이는 에스겔서 33장에 나오는 파수꾼 사명과 연결된다. 하나님께서 파수꾼에게 맡기신 임무는 나팔을 불어 백성에게 위험을 알리는 것이다. 파수꾼이 제대로 경고를 했다면, 백성이 돌이키지 않았을 때 그 피값은 그들 자신에게 돌아간다. 그러나 파수꾼이 나팔을 불지 않아 백성이 멸망했다면, 그 책임은 파수꾼이 져야 한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서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숨 가쁘게 복음을 전하고 가르쳤기에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깨끗하다”고 선언하는 장면은 파수꾼으로서 자신의 사명을 다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특히 이 부분을 목회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에게 깊이 적용한다. 교회 지도자는 바울처럼 진리를 분명히 전해야 한다. 복음은 때로 유대인에게 걸림돌이 되고 헬라인에게 미련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결코 타협하거나 포장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칭찬과 인정만 바라본다면 결코 죄를 지적할 수도 없고, 진실한 회개를 요구할 수도 없게 된다. 그러나 바울이 담대하게 “유대인과 헬라인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똑같이 증거했듯이, 교회는 어떤 상황에서도 복음의 본질을 흐리지 않고 전해야 한다. 오히려 복음이 생명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이들은, 죄와 불의로부터 돌이켜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된다. 이것이 교회가 세상 속에서 감당해야 할 유일무이한 사명이라는 것이다.
이후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성령이 여러분을 감독자로 세우셨다”고 말하며, 하나님의 피 값으로 사신 교회를 치라고 권면한다. 여기서 장재형 목사는 교회의 본질에 관한 아주 중요한 정의가 나온다고 설명한다. 교회는 사람이 자신의 취향이나 필요에 따라 선택적으로 가입하는 친목 모임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값 주고 산 하나님의 소유라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감독자(장로, 목회자)는 말 그대로 ‘두루 살피는’ 사명을 받은 자들이다. 양떼가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하고, 어그러진 말을 전하는 이단이나 거짓 교사들을 막아야 한다. 장재형 목사는 바울이 떠난 후 에베소 교회에 실제로 이단적 사조가 침투했음을 지적하며, 오늘날 교회도 여러 형태의 거짓 가르침과 분열을 경계해야 함을 거듭 강조한다.
교회 안에서 가장 큰 위험 중 하나는 바울이 언급한 “흉악한 이리”가 외부에서 침투해 양을 해치는 경우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내부에서 왜곡된 가르침이나 갈등이 불거져 회중을 혼란케 하는 경우가 더 치명적일 수 있다. 이는 사도행전 이후 초대교회가 끊임없이 직면했던 도전이기도 했다. 장재형 목사는 이런 혼란을 막아내기 위해선 성령의 인도하심에 늘 순종하고, 은혜의 말씀 위에 견고히 서야 한다고 말한다. 교회 지도자뿐 아니라 모든 성도가 끊임없이 복음의 본질을 상기하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직접 텐트 메이킹을 하며 자기 손으로 수고해 사역 경비와 동행자들의 생활을 자급자족했던 모습을 보면, 교회 지도자는 결코 물질이나 명예를 탐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자기 자신의 탐심을 이기고, 연약한 이들을 섬기는 데 최선을 다하는 것이 진정한 봉사의 본질이다.
장재형 목사는 결론적으로, 이 모든 가르침이 “무릎을 꿇고 함께 기도”하는 장면에서 마무리된다고 말한다. 바울이 장로들과 함께 드린 기도 속에는 마지막까지 함께하며 나누는 눈물의 교제가 담겨 있다. 서로 뜨겁게 울고, 입을 맞추며, 바울을 배까지 전송하는 장면은 목회자와 교우 사이의 끈끈한 사랑과 신앙 공동체의 정을 상징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사랑을 교회가 회복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현대 사회에서 개인주의와 분열이 만연하지만, 초대교회의 원형과 그리스도의 마음을 기억하면, 교회는 다시금 뜨겁게 서로를 위해 울고 기도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장재형 목사는 사도행전 20장 13절부터 38절에 담긴 바울의 여정과 그가 남긴 권면, 그리고 장로들과 나눈 뜨거운 교제가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말한다. 바울의 삶이 늘 겸손과 눈물, 회개와 믿음,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증거로 가득했듯이, 우리도 그러한 신앙의 길을 걸어야 한다. 주의 교회는 하나님이 피 값으로 사신 공동체이므로, 교회 지도자와 성도 모두 자신을 낮추고 서로를 사랑하며, 동시에 복음에 거스르는 거짓에 대해서는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발자취이자, 그를 본받아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는 진정한 교회다.
장재형 목사가 사도행전 20장을 중심으로 펼치는 목양 신학의 핵심은, 바울이 보여 준 ‘겸손과 눈물’ 그리고 ‘복음 전파에 대한 전적인 헌신’의 결합이 교회를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라는 점이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의 태도, 눈물은 이웃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 둘이 합쳐질 때 진정한 복음 사역이 탄생한다. 장재형 목사는 에베소 교회가 이 두 요소를 온전히 붙들 때 어떤 위기를 만나도 흔들리지 않았던 반면, 이를 잃었을 때 서서히 분열과 갈등, 나아가 이단의 침투까지 겪게 되었음을 지적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는 이 사도행전의 본문을 어떻게 적용하고, 어떤 길로 나아갈 수 있을까.
첫째로, 장재형 목사는 바울이 보여 준 ‘성령에 매임받은’ 순종의 태도를 깊이 묵상하자고 제언한다. 사도행전 20장 22절에서 바울은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심령에 매인다는 것은 성령의 강권적 이끄심을 따른다는 뜻이다. 이는 사역자나 성도가 일상에서 계획하는 모든 일이 성령의 인도하심에 근거해야 함을 함축한다. 많은 이들이 복음을 전하는 데 따르는 위험이나 시련을 두려워하거나, 혹은 자신의 안위와 편의를 먼저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처럼 성령에 붙들리면, 위험 앞에서도 뒤로 물러서는 대신 오히려 더 큰 용기와 헌신을 발휘하게 된다. 장재형 목사는 현대 교회가 이런 강력한 성령 충만과 인도를 갈망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제도적 안정이나 물질적 풍요에 안주하다 보면, 교회는 곧 안일함에 빠지게 된다. 성령에 매임받아 무엇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께 먼저 묻고, 그 부르심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영성이야말로 초대교회 공동체가 가진 생명력의 근원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둘째로, 장재형 목사는 바울이 말하는 ‘회개와 믿음’이라는 메시지를 재조명한다. 바울은 20장 21절에서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했다”고 선포한다. 여기서 회개와 믿음은 복음 전파의 핵심 구조다.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자신의 삶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며,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장재형 목사는 교회가 종종 회개를 강조하지 않은 채 믿음만을 편향되게 가르치거나, 혹은 믿음을 보이는 행동이나 열매와 무관하게 ‘개인적 신념’ 정도로 약화시키는 문제를 지적한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언제나 날카롭게 죄를 지적하고, 그 죄에서 돌이키는 회개 없이는 진정한 믿음이 세워질 수 없음을 강조했다. 이는 교회 지도자들이 설교와 가르침에서 불편하다고 회개의 요구를 생략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교회가 교회다워지려면, 성도 각자가 여전히 뿌리 깊은 죄성으로부터 돌이키기 위한 영적 투쟁을 이어가야 하며, 그런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경험할 때 비로소 온전한 믿음이 완성된다.
셋째로, 장재형 목사는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준 당부, 즉 “성령이 너희를 감독자로 세우신 것을 기억하라”는 말씀을 통해 현대 교회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역할을 강조한다. 감독자(장로, 목회자)는 교회 공동체와 그 양떼를 돌보아야 한다. 그 돌봄은 단순히 행정적 관리나 예배 주관이 아니라, 흉악한 이리나 어그러진 말을 하는 자들이 교회를 해치지 못하도록 영적 파수꾼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감독자가 되려는 사람이라면, 먼저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철저히 비추어보며 ‘내 양이 아닌 주의 양을 돌본다’는 경외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교회가 때로 조직적으로, 규모로, 재정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목표로 삼기 쉬우나, 바울이 가르치는 참된 성장은 양들의 영혼이 깨어 있고,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붙드는 데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만약 지도자가 세속적 성공이나 명예를 탐하여 교회의 영혼을 돌보는 일을 등한시하면, 곧 내부에서 여러 잡음과 분열이 싹트게 된다. 심지어 바울은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지도자가 한눈을 파는 사이, 교회 안에 또 다른 교주적 존재를 만들려 하거나, 교인들을 이끌어 왜곡된 길로 가려는 세력들이 생긴다는 경고다. 그러므로 교회 지도자는 늘 깨어 있고, 교회가 붙들어야 할 성경적 진리를 지켜 내야 한다.
넷째로, 장재형 목사는 바울이 자신의 사역을 “파수꾼”의 역할로 규정하며, 죄의 피 값을 자신에게서 찾지 못하리라고 선언하는 장면을 두고, 교회가 세상에 대해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 질문한다. 교회는 세상에 대한 파수꾼적 존재다. 보금자리 안에 모여 자기들만의 안위를 추구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주님의 나팔을 불어 세상에 경고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파수꾼이 되어야 한다. 만약 교회가 방관하거나 침묵함으로써 세상이 죄악에 물드는 것을 방치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책임을 교회에게 물으실 것이다. 바울은 “나는 너희에게서 물을 피가 없다”고 선언했는데, 이는 그가 할 말을 다 했고, 죄를 지적할 때 지적하며, 회개를 외칠 때 외쳤기 때문이다. 장재형 목사는 현대 교회도 이 바울의 태도를 본받아, 복음이 강조하는 생명의 가치를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 과정에서 거부와 조롱을 받을지라도, 마땅히 외칠 메시지는 분명히 외치고,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돌아오도록 손을 내밀어야 한다.
다섯째로, 장재형 목사는 바울이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교회 지도자의 물질관과 청빈의 미덕을 재조명한다. 오늘날의 교회는 다양한 재정적 압박과 세속적 욕망 속에 놓이기 쉽다. 바울은 교회를 세울 때 자비량으로 일하면서, 자기와 동행하는 자들까지 책임졌다. 이 모습은 당시로서도 매우 독특한 사례였다. 유대인 라비들은 제자들에게 일상적 필요를 공급받는 것이 자연스러웠고, 헬라인 철학자들도 후원을 받곤 했다. 그러나 바울은 스스로 생업을 유지하며 성도들에게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삶으로 증명했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가 자칫 재정을 운영하면서 세상의 ‘이익’ 논리에 빠질 수 있음을 경고한다. 또한 지도자가 물질적 풍요로 인해 교회에 부담을 주거나, 심지어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경우가 생길 때, 교회는 급격히 영적 힘을 잃어 버리고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바울처럼 자족하고 검소하게 사는 태도, 물질을 다룰 때 언제나 선교와 구제, 그리고 연약한 자들을 돕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 성경적 원리다.
결국 이런 모든 권면의 마지막은 사랑의 교제로 완성된다. 바울과 에베소 장로들이 꿇어 엎드려 기도하며 서로를 안고 울던 밀레도 해안의 장면은, 교회가 어떤 조직적 프로그램이나 화려한 외적 스펙보다도 먼저 회복해야 할 영적 사랑을 보여 준다. 장재형 목사는 공동체 안에 이러한 뜨거운 눈물과 간절한 기도가 살아 있을 때, 비로소 교회가 세상에 복음의 빛을 비추는 진정한 증인으로 설 수 있다고 역설한다. 에베소 장로들은 바울의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다고 여기며 큰 근심에 빠졌지만, 동시에 그들의 슬픔은 한편으로는 강력한 사랑의 표현이었다. 교회란 바로 그러한 영적 친밀감, 서로를 향한 간절함으로 묶인 공동체다. 장재형 목사는 사도행전 20장을 통해, 선교의 길은 고독하지만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재차 강조한다. 그 길에서 함께 눈물을 흘려 줄 동역자들이 있고,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바울의 이 여정과 권면은 오늘날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교회가 그 빛을 잃지 않으려면, 겸손과 눈물, 회개와 믿음, 그리고 성령에 매인 순종이 끊임없이 되살아나야 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교회의 기본이자 영적 DNA라고 부른다. 교회가 성장하고 성도가 많아져도, 이 기본이 없으면 공허한 외형에 그친다. 반대로 어떤 교회가 작고 미약해 보여도, 이 영적 DNA가 살아 있으면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강력히 드러난다. 따라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바울의 밀레도 사건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실천으로 옮겨야 한다. 교회 안에서 사랑의 눈물을 흘려 본 경험이 없는 이들은, 바울이 장로들과 함께 울며 기도했다는 사실이 낯설게 다가올지 모른다. 그러나 이 장면은 초대교회가 가진 본질적 사랑의 표징이며, 우리가 그 마음을 되찾을 때 교회는 세상 속에서 다시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공동체가 된다.
장재형 목사는 사도행전 20장의 말씀을 가르치면서, 궁극적으로 교회의 미래와 방향성에 대해 깊은 메시지를 전한다. 바울이 걸어간 길과 그가 전한 말씀 속에는 교회가 지켜야 할 믿음의 유산이 오롯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는 사도행전을 단순히 초대교회의 역사를 보여주는 고대 문서로 바라보지 않고, 현대 교회가 계속 써 내려가야 할 ‘열린 책’으로 해석한다. 사도행전 28장의 끝에서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교회가 곧 사도행전의 연장선상에서 계속 복음을 증거하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가는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울과 에베소 장로들 사이에 오간 이 장면에서 배워야 할 구체적 실천은 무엇일까.
첫째로, 장재형 목사는 교회 공동체가 반드시 ‘말씀 중심’으로 서야 한다고 강조한다. 바울은 “나는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전했다”고 말했다. 말씀이란, 사람을 그저 위로하기 위해 달콤하게 꾸미거나, 혹은 권위적으로 윽박질러 복종만을 유도하는 수단이 아니다. 말씀은 영혼을 회복시키고, 교회를 굳건하게 세우며, 동시에 죄와 불의를 깨뜨리는 능력을 지닌다. 그러므로 교회 지도자나 성도 모두가 매일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이키고, 그 뜻을 깨달아 삶에 적용하려고 힘써야 한다. 만약 교회가 말씀보다 세상의 지혜나 유행하는 철학에 더 민감해진다면, 곧장 사도행전 20장에서 바울이 경고했던 ‘흉악한 이리’와 ‘어그러진 말’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장재형 목사는 따라서 말씀을 붙드는 신앙 훈련이야말로 교회 안에 살아 있는 전통이 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둘째로, 교회 내부의 리더십이 어느 정도 구성되었다고 만족하거나 안도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에베소는 바울이 3년간이나 머물며 공들여 세운 교회였다. 바울 자신이 가르친 장로들이 있었기에, 그들의 영적 수준이나 관리 능력은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마지막 권면에서 매우 엄중한 경고를 한다.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들어와 양떼를 해칠 것이다. 더 나아가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다.” 교회가 한순간이라도 깨어 있지 않으면, 잘 세워진 공동체라도 무너질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교회가 끊임없이 깨어 기도하고, 스스로를 점검해야 하며, 영적 자만에 빠지지 않도록 늘 주의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어떤 프로그램이나 봉사, 혹은 업무 처리가 익숙해지고 능숙해졌다고 해서, 그 자체가 교회의 안전장치가 될 수는 없다. 오직 하나님께 무릎 꿇는 영성이야말로 교회를 지키는 방패라는 것이다.
셋째로, 장재형 목사는 바울이 말하는 ‘복음의 본질’을 재확인할 것을 촉구한다. 복음이란,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다. 율법의 무거운 멍에로 사람을 억압하는 소식이 아니며, 세상의 다원적 가치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세련된 방식으로 포장한 메시지도 아니다. 오직 죄에서 돌이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새 생명을 얻는, 그것이 본질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복음이야말로 교회를 교회되게 하며, 사람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새롭게 하는 능력이라는 사실을 역설한다. 문제는 우리가 종종 복음에 덧붙여 자기만의 해석이나 전통적 관습, 혹은 문화적 요소를 ‘이것도 복음’이라고 끼워 넣을 때 생긴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여러 갈래의 길로 갈라져 혼란에 빠지게 된다. 초대교회도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서 율법 문제로 크게 갈등했지만, 결국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의 원칙을 재확인함으로써 통일성을 지켰다. 오늘날 교회도 복음의 본질이 흔들리지 않도록, 늘 말씀과 성령에 의지해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넷째로, 교회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세상 속에서 섬김의 본을 보여야 한다고 장재형 목사는 말한다. 사회가 경쟁과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을수록, 교회는 거꾸로 ‘나눔’과 ‘헌신’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구현해야 한다. 바울이 직접 자기 손으로 텐트를 만들며 사역 재정을 마련했던 모습은, 오늘날 교회 리더에게 물질적 욕심 없이 사역에 전념하라는 강력한 도전이 된다. 장재형 목사는 물론 모든 교회 지도자가 자비량 사역을 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지도자의 마음 밑바탕에는 “내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을 더 기뻐하는가” 하는 자기 점검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교회 예산을 쓸 때도, 과연 이것이 복음을 확장하고 성도들을 돌보는 데 최우선으로 사용되는지 늘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교회가 물질을 건강하게 다룰 줄 모르면, 바울이 경고한 “어그러진 말”과 “흉악한 이리”는 물질적 이득을 노리고 교회를 집어삼키려 들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 교회는 재정적 투명성과 청렴성을 지켜야 하며, 필요하다면 바울처럼 수고를 아끼지 않는 헌신으로 모범을 보일 수 있어야 한다.
다섯째로, 교회 안에 뜨거운 기도와 사랑이 회복되어야 한다. 바울과 에베소 장로들이 함께 울며 기도하고, 서로를 껴안으며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이 장면은 사도행전 20장 전체를 하나의 숭고한 스케치로 만든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가 정말 살아 움직이려면, 설교자와 청중이, 혹은 목회자와 성도가 이처럼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함께 울 수 있는 사랑의 교제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현대 교회는 점차 대형화되고, 프로그램과 이벤트는 많아지지만, 정작 성도 간의 진솔한 교제가 부족해지는 경향이 있다. 교회 규모가 커질수록, 이런 영적 친밀감과 뜨거운 사랑의 모임이 사라질 위험이 크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종종 가정교회 형태로 모여 음식을 나누고, 서로의 형편을 살피며 기도하며 울었다. 바울이 그토록 애정으로 가르친 에베소 공동체도, 결국 그러한 사랑으로 묶인 관계였기에 바울과 헤어질 때 큰 소리로 울며 그를 배웅했다. 이 눈물은 개인적인 감정 분출이 아니라, 복음을 매개로 형성된 영적인 끈이었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가 정말 세상을 향해 나아가려면, 먼저 공동체 안에서 이런 사랑의 눈물이 살아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서로에게 무관심한 공동체는 결코 세상을 향해 복음을 실천적으로 전할 수 없다. 오히려 세상이 교회를 보며 “말만 그럴듯하다”고 빈정대게 될 뿐이다.
결론적으로, 장재형 목사는 사도행전 20장 13절부터 38절에 나타난 바울의 밀레도 권면이야말로 교회가 본질에 대해 어떻게 재무장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결정적 본문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긴 선교 여정에서 보여 준 꺼리낌 없는 복음 전파, 겸손과 눈물로 상징되는 목회 정신, 성령에 매임받은 순종, 그리고 파수꾼으로서의 책임을 모두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또한 교회 지도자들에게 거짓 교사를 경계하고 양떼를 살피며,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굳게 서라고 권면한다. 이는 단지 1세기 에베소 교회만의 과제가 아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 교회도 동일하게 이 권면을 붙들고, 또 새롭게 배워야 한다.
장재형 목사는 사도행전이 ‘계속 이어져야 할 책’임을 거듭 상기시키면서, 교회가 사도행전 29장, 30장을 써 내려간다는 상징적 표현을 사용한다. 그 말은 곧, 초대교회의 순수한 믿음과 공동체성이 지금 우리 시대에서도 그대로 이어져야 하며, 복음이 세워 놓은 사역의 터 위에서 교회가 새로운 역사를 창출해 가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기 위해선 바울이 보여 준 핵심 가치, 즉 사랑과 헌신, 회개와 믿음, 순종과 경계, 나눔과 기도 등이 한몸처럼 움직여야 한다. 교회가 이 원리를 놓치면, 아무리 외형적으로 성장해도 결국에는 영적 심장을 잃은 껍데기 공동체로 전락할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마지막으로 이 본문을 사랑하는 모든 성도와 목회자들이, 바울과 에베소 장로들이 함께 꿇어 기도하던 장면을 오늘의 현실 속에서도 재현하자고 권면한다. 서로가 서로의 목을 안고 울며,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그 기도의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교회가 회복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뼛속까지 새기며, ‘하나님의 피 값으로 사신’ 고귀한 공동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어,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게 한다. 이것이 장재형 목사가 사도행전 20장을 풀어내며 오늘날 신앙 공동체에게 전하고자 하는 본질적 메시지다. 교회는 한순간도 겸손과 눈물을 잃지 말아야 하며, 복음에 대한 열정을 식히지 않아야 하며, 무엇보다 성령의 이끄심 속에서 기도하며 서로를 세워 줘야 한다. 바울이 밀레도에서 남긴 ‘마지막 설교’와 ‘함께 울던 기도’는 멀리 1세기에 머물지 않고, 지금도 계속해서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하고 교회를 이끄는 생명의 소리로 울려 퍼지고 있다. 장재형 목사는 바로 그 울림에 귀 기울이는 이들이 많아질 때, 교회가 더욱 새로워지고 주님 다시 오실 길을 예비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