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목사, 창세기 3장의 원역사: 타락, 사탄의 유혹, 그리고 여자의 후손의 복음

장재형목사가 창세기 1–11장의 ‘원역사’를 중심축으로 삼아 인간의 타락과 사탄의 책략,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 계획을 정교하게 해석하면서, 오늘을 사는 신자가 어떻게 죄와 유혹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회복된 정체성을 살아낼 수 있는지를 신학적 통찰과 영성적 성찰 속에서 심도 있게 풀어낸 글이다.

장재형목사는 성경을 읽는 관문으로서 창세기 1장에서 11장까지를 ‘원역사’라는 하나의 커다란 서사 단위로 조망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 비교적 짧은 구간 안에 창조와 타락, 심판과 구원, 인류의 족보와 역사의 향방이 응축된 형태로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창세기 1–2장은 창조의 서곡을, 3–4장은 인간 타락과 죄의 발생을, 5장은 족보의 흐름을, 6–7장은 홍수 심판을, 그리고 이어지는 본문들은 새로운 구원의 궤적을 제시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원역사가 단순한 고대 전승의 모음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관통하는 신학적 원형(archetype)이라고 해석한다. 예수께서 “노아의 때에 된 것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눅 17:26)고 선언하신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마지막 심판과 구원의 패턴을 이해하려면 노아의 날, 곧 이 원역사의 구조를 깊이 숙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서도 창세기 3장은 인간 타락의 본질과 절차를 드러내는 핵심 텍스트로 자리 잡는다. 장재형목사는 에덴동산에 등장하는 뱀을 단순한 상징적 동물이 아니라 하나님께 반역한 영적 존재, 곧 사탄의 도구이자 표현으로 읽어내면서도, 동시에 성경이 결코 선과 악 두 원리가 대등하게 대치하는 이원론을 말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라는 구절은 사탄조차 피조물의 지위에 놓여 있음을 상기시킨다. 태초부터 하나님과 사탄이 동등한 두 절대자로 싸우는 구조가 아니라, 주권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안에서 한 피조물이 교만으로 추락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사탄의 타락의 심층 원인을 ‘자기 상승의 교만’으로 규정한다. 하나님과 비기려는 욕망, 하나님과 같은 자리를 탐하는 내적 충동이 모든 죄의 근원이라고 분석한다. 이 지점에서 그는 자연스럽게 빌립보서 2장을 불러온다. 타락한 영적 존재가 자기 과시와 자기 확대를 통해 무너졌다면, 하나님의 아들은 오히려 스스로를 비워 종의 형체를 취하셨다. 케노시스(kenosis), 곧 자기 비움과 자발적 낮아지심이라는 그리스도의 길은 사탄의 길과 본질적으로 정반대의 궤적이다. 장재형목사의 해석에 따르면, 바로 이 겸손과 순종의 길을 통해 사탄은 이미 심판을 받았고, 죄와 죽음이 지배하던 질서는 근본에서부터 전복되었다.

많은 이들이 신정론적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애초에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지 못하도록 설계하시면 되지 않았는가? 왜 넘어질 수 있는 구조를 허용하셨는가?” 장재형목사는 이 질문이 신학의 오래된 난제임을 인정하면서도, 그 해답의 중심에 ‘사랑’이라는 주제가 놓여 있다고 설명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Be fruitful)고 명령하셨다. 이 ‘열매 맺음’은 단순한 인구 증가를 의미하지 않는다. 사랑의 일체가 완성되는 상태, 곧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요 14:20)을 체험하는 관계의 성숙을 가리킨다. 사랑은 강압으로 생성될 수 없고, 리모컨으로 조정되듯 움직이는 존재에게서는 결코 진정한 사랑이 피어나지 않는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조종 가능한 인형이 아니라, 자유의지로 사랑을 선택할 수 있는 인격 존재로 지으신 것은, 위험을 감수한 결정이 아니라 오히려 창조의 영광, 사랑의 고귀함을 드러내는 선언이라는 것이다.

이 논리는 천사들에게도 확장된다. 유다서 1장은 어떤 천사들이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 자기 처소를 떠나 하나님께 반역함으로써,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심’을 받았다고 증언한다.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들조차 자유의지를 가진 피조물로서 순종과 반역을 선택할 수 있었고, 그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중요한 신학적 균형을 짚는다. 문제의 근원은 하나님께 있지 않고, 선하게 부여된 자유를 오용한 피조물에게 있다. 하나님은 악의 설계자가 아니라, 악으로 인해 고통을 받으시고 탄식하시는 피해자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계를 잘못 만들어서 이런 비극이 벌어졌다는 식의 책임 전가는, 창조주를 향한 심각한 오해이자 또 다른 형태의 반역이라고 그는 경고한다.

창세기 3장에 등장하는 뱀의 첫 발언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노골적인 도전이다. 하나님이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분명하게 경고하셨음에도, 뱀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정반대의 선언을 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짧은 문장 안에 사탄의 전략이 집약되어 있다고 본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의혹을 불러일으켜 진리에 대한 신뢰를 흔들고, 이어서 진리를 거짓으로, 거짓을 진리로 전도(顚倒)한다. 그러나 단순한 논리적 반박만으로는 인간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기 어렵다. 그래서 사탄은 여기에 달콤한 유혹과 미묘한 질투심을 교묘하게 섞는다. “하나님이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될 줄 아신다”는 속삭임은, 하나님을 사랑의 창조자가 아니라 좋은 것을 독점하려는 존재로 왜곡하여, 인간의 내면에 조용한 반역심과 불편한 불신을 자라게 만든다.

장재형목사는 죄를 범한 존재의 특징을 ‘함께 타락시키려는 충동’으로 진단한다. 스스로 죄를 저지른 후 깊은 불안 속에 빠진 마음은, 홀로 책임을 떠안기보다 다른 이들을 끌어들여 죄를 정상화하고 집단화함으로써 불안을 가라앉히려 한다. 그래서 사탄은 끈질기게 인간을 유혹하며, “같이 무너지자”는 심정으로 죄의 회(會)를 확장해 간다. 계시록이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이 떨어졌다”고 묘사할 때 장재형목사는 이를, 사탄이 다른 천사들까지 미혹하여 추락시킨 사건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읽어낸다. 오늘날 문화 전반에서 왜곡된 가치와 죄가 구조화되고, 각종 콘텐츠와 여론을 통해 반복적으로 재생산되는 현상 역시, 같은 영적 원리 위에 서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또 하나 중요한 통찰은 에덴에도 분명한 계명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때때로 천국을 일종의 무제약적 자유 공간으로 상상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선악과에 대한 금령은 창조주이자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명확한 경계였다. 천국은 ‘하고 싶은 대로 아무 것이나 해도 되는 곳’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질서의 세계다. 계명이 존재한다는 것은 사랑이 훼손되었다는 징표가 아니라, 사랑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보호되어야 하는지 보여주는 울타리다.

그러나 뱀의 시선에서 보면 이 계명은 억압의 상징으로 비친다. 그래서 사탄은 “왜 하나님만 선과 악을 규정하는 최종 기준이 되어야 하느냐, 너도 그 자리에 앉을 수 있다”는 속삭임을 주입한다. 장재형목사에게 이것은 교만의 핵심이다. 하나님만이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 최종적으로 판단하실 수 있는 분이신데, 피조물이 그 자리를 빼앗아 스스로 선악의 근원적 기준이 되려는 순간, 타락의 문이 열리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각자가 알아서 옳고 그름을 정한다”, “절대 진리는 없다”는 구호가 매혹적으로 들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유라는 이름 아래 선악의 기준 자체를 해체해 버리면, 결국 세계 전체가 상대주의와 극단적 자기중심성의 홍수 속에 잠기게 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타락은 어떤 과정으로 진행되는가. 장재형목사는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라는 구절에 주목한다. 이 짧은 표현 안에 유혹의 전형적인 3단계가 내포되어 있다. 먼저 눈으로 보고(안목의 정욕), 마음으로 탐내고(육신의 정욕), 마침내 손을 내밀어 취하는 행위가 뒤따른다(이생의 자랑). 요한일서 2장이 설명하는 세상 정욕의 구조가 창세기 본문 속에서 서사적으로 재현되는 셈이다. 오늘날의 성적 유혹과 물질주의적 유혹도 같은 경로를 따른다. 영상과 이미지가 시선을 사로잡고, 상상과 욕망을 자극한 뒤, 결국 행동과 습관으로 굳어지게 만든다. 장재형목사는 그래서 무엇보다 ‘무엇을 보는가’를 경계하라고 권면한다. 죄는 이미 문 앞에서 웅크리고 있다가, 우리가 고개만 내밀면 붙잡으려 기다린다(창 4:7).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아우 아벨을 시기하여 살해에 이르는 과정도 동일한 구조를 따른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 열납하셨을 때, 가인은 놀라고 두려워하며 은혜를 깨달아야 마땅했다. 죄인의 제사를 받아주셨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과분한 은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쁨과 감격이 아니라 분노와 상처로 받아들였고, 그 안에서 자라난 시기와 질투가 마침내 살인의 죄로 연결된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인간 죄성의 핵심인 ‘자기중심성(egocentrism)’으로 분석한다. 자신을 기준으로 하나님과 타인을 평가하고, 은혜 앞에서도 “왜 나는 더 인정받지 못하는가”를 묻는 태도가 바로 죄의 심연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인간이 완전히 어둠으로만 규정되는 것은 아니다. 장재형목사는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 알고”라는 표현에서 인간 존재의 독특한 양면성이 드러난다고 본다. 죄를 범한 순간, 인간은 그것이 잘못이라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인지한다. 수치심과 두려움이 밀려오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을 급히 가리려 한다. 동물은 부끄러움을 모른 채 본능대로 살아가지만, 인간은 진리에서 이탈할 때 존재론적 수치와 실존적 불안을 경험하도록 지음 받았다. 이는 인간 영혼 깊은 곳에 하나님을 향한 본능적 방향성이 새겨져 있다는 표지다. 해바라기가 태양을 향해 고개를 돌리듯, 인간의 영혼은 본래 창조주를 향해 기울어 있다. 죄는 이 방향을 왜곡하고 흐리게 만들지만, 그 내적 각인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다.

무화과 잎을 엮어 만든 옷은 인간의 자기 의(義)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읽힐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의 죄를 가리기 위해 도덕과 종교, 체면과 업적이라는 잎사귀들을 서둘러 엮어 치마처럼 두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여전히 벌거벗은 존재임을 피할 수 없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이러한 아담과 하와를 즉각적인 절멸로 처분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다는 사실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선취된 은혜의 표지’로 해석한다. 누군가의 피흘림과 희생을 전제해야만 얻을 수 있는 가죽옷은, 훗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완성될 속죄와 의의 옷을 미리 보여주는 예표다. 죄로 인해 수치와 두려움 속에 숨어들어 간 인간에게 하나님은 먼저 다가오셔서 “네가 어디 있느냐”고 부르시고, 그 수치를 덮어 주신다.

여기서 장재형목사는 하나님의 음성의 뉘앙스를 특히 강조한다. “네가 어디 있느냐”는 말씀은 분노에 찬 호통이 아니라, 상한 영혼을 찾아 나서시는 애틋한 사랑의 호명이다. 이 질문이 곧 구원의 출발점이다. 하나님은 죄인을 향해 먼저 “왜 그랬느냐”고 추궁하기보다, “지금 어디에 있고, 왜 나를 피하느냐”고 묻는다. 오늘을 살아가는 신자에게도 이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밤사이 뱀의 유혹에 넘어져 마음이 무너졌을지라도, 아침에 다시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가 “주여,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회복의 첫 걸음이라고 장재형목사는 권면한다.

그러나 타락 서사의 가장 아픈 장면은 아담의 첫 대답에서 발견된다.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한마디에 죄의 또 다른 본질인 책임 전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고 본다. 아담은 자기 죄를 정직하게 인정하기보다 여자를 탓하고, 나아가 “나와 함께 하라고 주신 여자”라는 표현을 통해 은근히 하나님께 책임을 돌린다. 반면 신약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선포한다. 아담은 죄를 남에게 떠넘겼고, 그리스도는 남의 죄를 자기에게로 떠맡으셨다. 이 극명한 대조 속에서 구원 역사의 방향이 분명해진다.

장재형목사는 예수를 닮는다는 것이 결국 이 방향의 전환을 뜻한다고 설명한다. “네 탓”을 외치던 입술이 “내 탓이요, 내 큰 탓이로소이다”를 고백하는 입술로 바뀌는 것, 타인에게 짐을 전가하던 사람이 “서로 짐을 지라”(갈 6:2)는 말씀에 순종하여 남의 짐을 함께 지는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 제자의 표지다. 오래된 전통 교회에서 드리는 “내 탓이요, 내 큰 탓이로소이다”라는 회개 기도 역시 동일한 영적 원리 위에 서 있다.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며 인류의 죄를 짊어지신 것처럼,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도 자기중심성의 회로를 끊고 책임을 감당하는 사랑의 길로 부름 받는다.

이 모든 서사적 흐름의 배후에는 보이지 않는 영적 전쟁이 펼쳐져 있다. 욥기에는 사탄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와 욥을 고발하는 장면이 묘사된다. “이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주께서 울타리로 그를 보호하셨기 때문이지, 진정한 경외가 아니다”라는 식의 조롱 섞인 논거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을 “누가 누구를 다스릴 자격이 있는가”를 둘러싼 우주적 논쟁으로 이해한다. 창세기 3장의 타락 장면에서도 사탄은 사실상 하나님께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이다. “보시지 않았습니까? 이 인간들은 나를 다스릴 자격이 없습니다. 오히려 내가 이들을 다스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도전에 대해 마지막 아담, 곧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응답하신다.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광야에서 세 차례의 시험을 받으시되, 모두 기록된 말씀으로 응수하여 승리하신다. 생존을 둘러싼 떡의 시험, 종교적 과시와 안전을 둘러싼 성전 꼭대기 시험, 영광과 권세를 둘러싼 절대 충성의 시험까지 모두 이기신 후에야 마귀는 떠나가고, 천사들이 나아와 수종든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히브리서 1장이 말하는 창조 질서, 곧 “모든 천사는 구원받을 상속자들을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은 섬기는 영”이라는 선언이 역사 속에서 구체화된 장면이라고 해석한다. 첫 아담은 뱀 앞에서 무너졌지만,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는 사탄을 굴복시키고, 잃어버린 창조 질서를 되찾으셨다.

다시 창세기 3장 14–15절로 시선을 돌려 보면, 이 짧은 본문 안에 죄와 심판, 그리고 구원의 약속이 고밀도로 농축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은 먼저 뱀에게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고 선포하신다. 장재형목사는 이 구절을 통해 ‘남을 죄에 빠뜨리는 자에 대한 심판’이 얼마나 엄중한지를 상기시킨다. 예수께서도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자는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낫다고 말씀하셨다. 유혹을 조장하는 문화, 죄를 부추기는 구조, 타인을 넘어뜨리는 말과 행동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무거운 책임을 지게 된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심판의 말씀만을 남기지 않으신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장재형목사는 교회 전통이 이 구절을 ‘원시복음’이라 부르는 이유를 따라, 이를 성경 전체에 나타나는 최초의 복음 약속으로 읽는다. 아담 안에서 인류 전체가 총체적으로 무너졌지만, 하나님은 새로운 씨, 새로운 인류의 머리가 될 분을 예언하신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발꿈치를 상하는 고난을 겪으시지만, 그 피흘림을 통해 사탄의 머리를 짓밟는 결정적 승리를 성취하신다. 로마서 5장은 “한 사람의 순종하지 않음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 이 구속사적 진리를 선명하게 선포한다.

이 지점에서 장재형목사는 신자의 정체성 회복이라는 주제로 시선을 옮긴다. 신자는 더 이상 두려움과 수치심에 갇힌 노예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양자의 영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다. 로마서 8장은 “우리가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증언한다. 요한복음 1장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선언한다. 칭의는 감정적 위로의 차원이 아니라, 법적·지위적 전환 사건이다. 죄인의 자리에서 아들의 자리로 옮겨지는 순간, 존재의 신분이 바뀌고, 그에 상응하는 권세와 책임이 부여된다. 그 책임 가운데 중요한 부분이, 사탄의 거짓을 분별하고 더 이상 그 거짓에 끌려가지 않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다스리는 삶을 사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장재형목사는 이 모든 메시지가 부부와 가정, 그리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구체화될 수 있는지를 짚어낸다.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는 어느 먼 옛날 부부의 일화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 각자의 관계를 비추는 거울이다. 배우자의 탓을 하며 서로를 죄와 상처로 몰아가는 관계가 아니라, 상대의 짐을 함께 지고 “내 탓”을 먼저 고백하는 관계가 천국의 질서에 가까운 가정이다. 현대 문화는 경계를 허물고, 쾌락과 자기실현을 절대 선으로 포장하며, “진리는 없다, 각자 원하는 대로 살면 된다”고 속삭이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말한다. 진리는 존재하고, 선과 악은 구분되며, 하나님의 말씀이 그 최종 기준이라는 사실이다.

창세기 1–11장의 원역사는 인류의 먼 과거를 설명하는 동시에, 우리의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자 다가올 미래를 예고하는 예언적 패턴이다. 노아의 날에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상에만 몰두한 채 타락의 깊이를 느끼지 못하는 시대일수록, 하나님의 말씀과 심판, 그리고 구원의 약속을 더욱 깊이 붙들어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창세기 3장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너는 누구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누구의 말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가.” 뱀의 달콤한 거짓말을 따라 “같이 죽자”는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네가 어디 있느냐”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에 응답하여 생명의 길로 돌아올 것인가.

결국 장재형목사의 설교는 한 가지 초청으로 수렴된다. 여자의 후손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서 수치와 두려움의 낡은 옷을 벗고, 하나님이 주시는 의와 사랑의 새 옷을 입으라는 초청이다. 이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은 더 이상 뱀의 문화에 휩쓸리지 않고, 원시복음이 약속한 대로 뱀의 머리를 밟는 삶, 곧 그리스도의 승리에 참여하는 삶으로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그 삶은 일상 한가운데에서, 가정과 일터와 교회 속에서, 조용하지만 견고하게 펼쳐져야 한다고 장재형목사는 진중하게 전한다.

davidja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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