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재형(장다윗)목사가 전개하는 에베소서 4장 강해는 교회의 본질이라는 심오한 주제를 탐색하며, 통일성과 다양성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그리스도론과 교회론의 정수를 펼쳐 보입니다. 바울 사도가 제시한 교회의 하나됨은 ‘한 분 하나님, 한 분 주님, 한 분 성령, 한 믿음, 한 세례, 한 소망, 한 몸’이라는 일곱 개의 견고한 신학적 정초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근원들을 역순으로 고찰함으로써, 만유의 아버지이신 한 분 하나님으로부터 교회의 통일성이 필연적으로 귀결되는 논리적 경로를 선명하게 제시합니다. 이처럼 절대적인 통일성의 대전제 위에서, 그는 이제 바울의 시선이 어떻게 교회의 내적 생명력인 ‘다양성’의 영역으로 섬세하게 이동하는지를 조명하며, 이 두 개념이 어떻게 변증법적 긴장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지를 논증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바울 사도가 견지했던 거시적인 역사관을 역삼각형(▽)과 정삼각형(△)이 만나 하나의 점(▷◁)으로 수렴되는, 직관적이면서도 심오한 기하학적 상징으로 풀어냅니다. 이는 인류의 전 역사가 알파(α)라는 기점에서 출발하여 오메가(Ω)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단일한 수렴점을 향해 전개되어 왔으며,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목표로 하는 새로운 구속사적 경륜이 시작되었음을 시각적으로 웅변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기독교는 수많은 종교적 선택지 중 하나가 아니라, 역사의 시원과 종결을 관통하는 유일무이한 진리로서 그 위상을 확립합니다. 창세 전부터 예비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역사의 정점에서 성취되었고, 그를 반석으로 세워진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라는 장엄한 건축물이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예루살렘과 로마를 거쳐 땅끝으로 확장되는 이 역동적인 운동의 최종 목적지는, 바로 통일성과 다양성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 유기체,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러한 우주적 비전은 필연적으로 선교학적 패러다임의 근본적인 전환을 요구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1960년대 이후 신학계를 풍미했던 ‘세속화 신학’과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개념을 소환하여, 선교의 지평이 어떻게 확장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의 ‘세상’을 교회라는 울타리 안으로 국한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려는 전 인류와 피조 세계 전체로 이해하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은, 교회의 사명이 세상으로부터 신자들을 ‘모으는 것’에만 있지 않음을 명백히 했습니다. 오히려 선교의 주체는 개별 교회가 아닌 하나님 자신이시며, 교회는 그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기 위해 세상 속으로 ‘흩어지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과정신학이나 유신진화론처럼 기독교의 핵심 교리인 타락과 죄, 구속의 은혜를 희석시키는 신학적 조류에 대해서는 명확한 신학적 분별력을 유지하면서도, 구원의 대상이 온 세계를 포괄해야 한다는 ‘미시오 데이’의 통찰을 적극적으로 수용합니다.
결론적으로 교회는 ‘인앤아웃(In & Out)’, 즉 거룩한 공동체로 모이는 구심력과 세상으로 흩어지는 원심력을 동시에 갖춘 역동적인 유기체여야 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세계가 하나의 ‘글로벌 빌리지(Global village)’로 변모하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교회의 선교적 사유 역시 지엽적 경계를 넘어 전 지구적(Global) 관점을 견지해야 함을 역설합니다. 이러한 인식의 확장은 미전도종족을 향한 구체적인 헌신과 성경 번역 사역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등, 선교의 개척자적 정신을 고취시키는 긍정적인 동력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선교적 노력의 귀결점은 명확합니다. 역사의 어떤 저항에도 굴하지 않고 반드시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바울 사도가 이미 2000년 전에 제시했던 ‘우주적 그리스도론(Cosmic Christology)’을 통해, 이 거대하고 신비로운 ‘그리스도의 몸’이 완성될 날에 대한 소망을 우리에게 다시금 일깨워 줍니다.
이처럼 장엄한 교회의 통일성과 우주적 비전을 펼쳐 보인 장재형 목사는, 이제 에베소서 4장 7절 이하의 본문을 통해 그 통일성 안에 내재된 ‘다양성’의 원천이 바로 ‘은혜(카리스마, Charisma)’임을 천명합니다. 그는 이 은혜의 본질을 인간의 공로주의적 사유 체계를 근본적으로 전복시키는 마태복음 20장의 ‘포도원 품꾼 비유’를 통해 탁월하게 해석합니다. 이른 아침부터 종일 수고한 자와 마감 한 시간 전에 부름받은 자가 동일한 품삯을 받는다는 설정은, 율법적 정의의 관점에서는 명백한 ‘불공평’입니다. 그러나 장재형 목사는 바로 이 합리적 계산을 초월하는 ‘불공평함’이야말로 은혜의 핵심 속성임을 역설합니다. 은혜는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주권적인 주인의 선하심과 자비에 근거한 예측 불가능한 ‘선물(Surprising Gift)’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11번째 아들 요셉이 장자의 상징인 채색옷을 입었던 구약의 상징적 사건을 인용하며, 자격 없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은 것 자체가 이와 같은 경이로운 은혜의 사건임을 상기시킵니다.
이러한 파격적인 은혜의 깊이를 체감하기 위한 전제 조건은 바로 우리 자신의 실존에 대한 정직한 인식입니다. 장재형 목사는‘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라는 로마서의 고백과, 세리 마태를 부르시며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선언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은혜가 가닿는 자리가 어디인지를 명확히 합니다. 오백 데나리온을 탕감받은 자가 더 크게 감사하듯, 우리 자신의 죄인됨에 대한 실존적 자각이 깊어질수록, 우리에게 베풀어진 은혜가 얼마나 값비싼 희생을 통해 주어진 것인지를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교회 공동체가 진정한 한 몸을 이룰 수 있는 힘은, 바로 이처럼 각자의 자격 없음을 고백하는 죄인들을 동일한 은혜로 품으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에서 발원합니다.
이 은혜의 기초 위에서 장재형 목사는 에베소서 4장 8절,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는 구절의 심오한 의미를 탐구합니다. 시편 68편을 인용한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죽음과 죄의 권세를 깨뜨리신 영적 전쟁의 위대한 승리자, 즉 개선장군(凱旋將軍)의 이미지를 연상시킵니다. 교회에 주어진 다양한 직분과 은사는 바로 이 승리자가 자신의 백성에게 나누어주는 영광스러운 ‘전리품’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9-10절의 ‘내려오셨다가 올라가심’에 대한 바울의 논증은, 자기를 비우심(케노시스, κένωσις)을 통해 만물을 충만케(플레로마, πλήρωμα) 하시는 기독론의 역설적 신비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승천은 그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낮아지심을 전제하며, 바로 이 ‘비움과 낮아짐’이야말로 그의 승리와 만물 충만의 동력이었습니다. 우리가 받은 모든 은사는 바로 이 그리스도의 위대한 승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승리의 선물로 우리에게 주신 다양한 직분들(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 등)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입니까? 장재형 목사는 12절을 통해 그 목적이 세 가지로 요약됨을 설명합니다. 첫째, ‘성도를 온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는 ‘온전하게 하다(카타르티스모스, καταρτισμός)’라는 헬라어가 본래 부러진 뼈를 맞추는 외과적 용어였음을 지적하며, 교회가 세상에서 상처받고 파괴된 영혼들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영적 외상 센터’의 기능을 수행해야 함을 역설합니다. 둘째, 온전하게 회복된 성도들이 다시금 ‘봉사의 일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치유받은 자는 수혜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를 섬기는 사역의 주체로 세워져야 합니다. 셋째, 이 모든 과정을 통해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는 개별적인 사역들이 지향해야 할 공동의 목표이며, 역사의 종점에서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부터 함께 건축해 나가는 거룩한 사명입니다. 결국 장재형 목사의 강해는, 그리스도의 승리로부터 흘러나온 은혜의 선물을 각자의 분량대로 받은 우리가, 그 다채로운 직분을 통해 서로를 온전하게 세우고 함께 섬김으로써, 마침내 하나의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가는 교회의 역동적인 모습을 장엄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