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재형 목사는 로마서 1장 20절에서 22절까지의 본문은 짧은 구절 속에 인간 존재의 근원과 타락의 지점을 동시에 관통하는 거대한 선언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라는 바울의 외침은 인간이 하나님을 외면하는 이유가 결코 정보의 부족이나 지적 결핍 때문이 아니라고 진단합니다. 데이비드 장(David Jang, 올리벳 대학교 설립) 목사는 이 대목에서 인간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외면의 의지와 전도된 욕망, 그리고 무엇보다 ‘감사’를 잃어버린 마음의 방향성에 주목합니다. 그는 신앙을 단순한 감정적 도약으로 정의하지 않고, ‘나’라는 내면과 ‘세계’라는 외연을 동시에 열어젖히며 우리가 결코 창조주 앞에서 변명할 수 없는 자리로 인도합니다.
바울이 직조한 이 논증의 틀은 인간 내부에서 울려 퍼지는 주관적 증언과 외부 세계가 연주하는 객관적 증언이라는 두 겹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통해 하나님을 부정하는 행위가 관념적 선택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태도의 문제임을 분명히 합니다. 우리는 양심이라는 내적 갈망을 통해 이미 어떤 거부할 수 없는 ‘호출’을 경험하며, 동시에 우주의 정교한 질서와 생태계의 상호의존성이라는 외부의 메시지를 듣습니다. 따라서 로마서 1장 20절은 자연에 대한 단순한 찬미를 넘어,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 자체가 곧 창조주의 메시지라는 인식론적 전환을 요구합니다. 신적 실재는 숨겨진 퍼즐이 아니라, 정직한 시선을 가진 이라면 누구나 마주할 수 있는 공공의 표지판과 같습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에서 자주 등장하는 ‘나와 세계’라는 틀은 인간이 스스로를 관찰할 때 마주하게 되는 윤리적 잔향을 설명합니다. 어떤 가치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은 개인의 취향이 아니라, 우리를 생산해낸 근원으로부터 온 외적인 명령에 가깝습니다. 칸트가 말한 ‘빛나는 하늘’과 ‘내면의 도덕률’이 나란히 소환되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하늘의 광막함이 주는 외부적 압도감과 양심이 주는 내부적 압도감은 결국 한 지점을 가리킵니다. 인간은 자족적인 존재가 아니며, 우리 안에는 나를 넘어서는 선명한 호출이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시선을 세계라는 거대한 무대로 옮기면, 그곳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의미의 문법이 기록된 텍스트가 됩니다. 장재형 목사는 그리스인들이 우주를 ‘질서’를 뜻하는 ‘코스모스’라 불렀던 통찰을 인용하며, 세계의 운행이 무작위적인 혼돈이 아니라 놀라운 법칙성을 띠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현대 과학이 발견하는 미시와 거시 세계의 일관성 앞에서 인간은 ‘우연’이라는 단어로 도망치려 하지만, 정교한 조화는 자꾸만 우리를 ‘목적’과 ‘의미’의 방향으로 이끕니다. 자연계시는 인간에게 신의 존재를 수학적으로 증명해 보이기보다, 이 세계 앞에서 창조주를 모른 척하는 것이 얼마나 큰 도덕적 회피인지를 폭로하며 인간에게 존재적 책임을 부여합니다.
이러한 책임의 근거를 장재형 목사는 일상의 정교한 건축물이나 강단의 설계에 비유하여 설명합니다. 작은 인공물 앞에서도 설계자의 의도를 당연하게 수용하는 인간이, 그보다 수만 배 정교한 우주 앞에서 설계자가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이성적 비대칭입니다. “핑계치 못할지니라”는 선언은 과학에 대한 배척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이성이 스스로에게 정직할 것을 요구하는 거울입니다. 믿음은 사고의 중단이 아니라, 생각을 정직하게 교정하여 질문이 현실의 증언을 외면하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행위입니다. 보이지 않는 전자기파나 바람을 그 영향력을 통해 믿듯이, 하나님에 대한 문제 역시 ‘시각적 확인’이 아닌 ‘해석과 반응’의 영역인 것입니다.
논의의 정점은 로마서 1장 21절과 22절로 이어집니다. 바울은 인간이 하나님을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영화롭게 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았다고 지적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감사의 부재’를 죄의 본질로 다룹니다. 죄는 단순한 규범 위반이 아니라 관계의 파탄이며, 창조주께 돌려야 할 영광을 가로채는 질서의 왜곡입니다. 감사는 피조물의 마땅한 표정이며 영혼의 건강을 가늠하는 척도입니다. 이것이 사라질 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세계의 중심에 두는 오만에 빠지며, 결국 감당할 수 없는 왕좌의 무게에 짓눌려 스스로 붕괴하게 됩니다.
결국 죄는 지성의 왜곡으로 이어져 “생각이 허망하여지고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지는” 결과를 낳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현대인의 고질적인 병폐를 ‘감사 없는 합리성’으로 진단합니다. 정보와 기술은 넘쳐나지만 정작 경외와 찬양이 메마른 시대 속에서, 지식은 늘어나되 지혜는 멀어지는 역설이 발생합니다.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에서 묘사된 그 미세한 손가락 사이의 공백처럼, 인간은 스스로 충분하다고 외치면서도 늘 근원적인 결핍을 느낍니다. 그 결핍의 공간은 자력으로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인정하고 감사와 예배로 나아갈 때 비로소 메워집니다.
파스칼의 내기처럼 믿음은 무책임한 도박이 아니라 삶 전체를 거는 실존적 결단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삶은 필연적으로 감사의 근거를 잃고 인간을 야만적 존재로 만듭니다. 은혜를 당연한 권리로 착각할 때 탐욕과 냉소가 잉태됩니다. 반면 감사가 깊은 사람은 세계를 ‘선물’로 읽어내며, 경쟁의 경기장을 경이의 무대로 변모시킵니다. 존재 자체가 선물임을 깨닫는 이에게 신앙은 의무의 굴레가 아니라 기쁨의 해방입니다.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는 결론은 명확합니다. 지성은 창조주를 대체하는 왕이 아니라 그분을 찬양하는 청지기로서 기능해야 하며, 그 축을 하나님께 돌려놓을 때 비로소 인간은 가장 인간다운 존엄을 회복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