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목사 고린도후서 9장 해설

고린도후서 9장은 흔히 ‘연보’로 요약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은혜가 어떻게 인간의 마음을 넉넉하게 만들고, 그 넉넉함이 이웃을 살리는 나눔으로 흐르며, 그 나눔이 다시 하나님께 넘치는 감사로 되돌아오는 거대한 순환의 서사를 정교하게 그려낸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을 읽을 때 무엇보다 먼저 복음이 추상적 표어가 아니라 구체적 사랑의 형태를 띠는 순간에 비로소 진실해진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기근으로 지쳐 있던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이방 교회들의 연보는 단지 물질의 이동이 아니라 “우리는 한 몸”이라는 신앙고백이 현실에서 증명되는 장면이었다. 바울이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 내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나니”라고 말했을 때, 그 단문에는 고린도 교회의 성숙을 신뢰하는 사도의 마음이 들어 있고, 교회가 영혼만이 아니라 일상의 무게까지 함께 지는 공동체라는 정체성이 다시 새겨진다. 장재형(장다윗)목사는 바로 이 대목에서 오늘의 교회가 회복해야 할 본질을 보게 한다.위로의 언어로 머무르지 않고 장바구니를 실제로 가볍게 하며 오늘을 버티게 하는 손길로 나아가는 돌봄, 이것이 복음의 열매라는 것이다.

바울의 리더십은 미묘하지만 힘이 있다. 그는 다그치거나 죄책감을 자극하지 않고, 고린도 교인들의 ‘첫 마음’을 조용히 깨운다. 1년 전부터 이어 온 열정을 상기시키고, 디도와 형제들을 먼저 보내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게 한다.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는 문장은, 나눔의 핵심이 액수의 크기가 아니라 마음의 진정성에 있음을 못 박는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격려”라고 해석한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내가 기쁘기 때문에 스스로 정해 드리는 것—복음의 리듬은 언제나 자유와 기쁨의 음계를 따른다. 억지로 쥐어짜는 모금은 복음의 자유를 손상시키지만, 첫 마음을 존중하는 목회는 은혜의 불씨에 바람을 불어넣는다.

9장의 중심부에는 간명하지만 날카로운 원리가 자리한다.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장재형목사는 이 문장을 ‘더 내면 더 번다’는 거래 공식으로 오해하지 말라고 거듭 강조한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등가교환의 법칙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경제학에 대한 신뢰이다. 농부가 더 큰 수확을 바라며 아까운 씨를 땅에 묻듯, 은혜의 풍성함을 믿는 사람은 자신의 소유를 ‘씨’로 보기 시작한다. 나눔은 소비가 아니라 파종이며, 쥐고 있을수록 줄어드는 것이요, 심을수록 생명이 자라는 것이다. 이 관점의 전환은 성도의 재정 구조를 재구성한다. 먹을 ‘양식’과 심을 ‘씨앗’을 구분하고, 씨앗을 ‘남으면 하는 항목’이 아니라 ‘먼저 떼어 심는 항목’으로 올려두는 일—장재형목사는 이것이 신앙의 실천으로서 재정의 첫 단추라고 말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양식과 씨앗을 모두 주시는 분이라고 증언한다. 그러니 베풂은 고갈의 길이 아니라 풍요의 경작지이며, 결핍이 아니라 수확으로 이어지는 신뢰의 행위다.

결정적인 구절은 7절이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여기서 ‘즐겨’(힐라로스)는 잠깐의 들뜸이 아니라 은혜를 깨달아 기꺼워진 상태, 비교와 강요의 그림자에서 벗어난 자유의 얼굴을 가리킨다. 장재형목사는 이 문장을 기독교적 나눔의 ‘헌장’이라 부르며, 헌신이 타인의 시선이나 외부 규율로 결정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선 인격의 분별과 기도로부터 나온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래서 나눔은 시험지가 아니라 예배의 장면이 된다. 바울이 곧바로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사,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려 하심이라”고 이어 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넉넉함’은 잔고의 숫자보다 마음의 충분함, 곧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충분하다는 자족의 감각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넉넉하게 하시는 목적은 분명하다. 나만 편안하라고가 아니라, 더 많이 흘려보내라는 초대다. 은혜는 멈추면 상하고 흐를 때 살아난다. 흐르는 은혜가 공동체의 생태계를 적시고, 다시 감사의 수증기로 피어올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바울은 시편 112편 9절을 소환한다.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흩음’은 낭비가 아니라 의(義)의 형식이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선 이의 삶은 자연스레 흩어지고, 그 열매는 일시적 칭찬을 넘어 영원을 향해 자란다. 이어지는 10절은 더 대담한 약속을 제시한다.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비할 양식만이 아니라 심을 씨까지 주신다. 그렇다면 “씨가 없어 못 심는다”는 변명은 설 자리를 잃는다. 문제는 씨의 결핍이 아니라 믿음의 결핍, 혹은 씨를 창고에 쌓아 두려는 습관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구절에서 하나님이 친히 은혜의 선순환을 개시하신다는 보증을 읽어낸다. 하나님이 씨앗을 공급하신다면 우리의 몫은 지체 없이 땅에 맡기는 일이다. 땅에 묻히지 않은 씨는 씨가 아니고, 쓰이지 않은 은사는 은사가 아니며, 흐르지 않는 재화는 금세 썩는다. 심을 때 자라는 법칙은 농경만이 아니라 영성의 법칙이기도 하다.

나눔의 파장은 수혜자의 결핍 해소를 훨씬 넘어선다. 바울은 11절부터 그것을 세 갈래로 펼친다. 첫째, 하나님께 향한 ‘넘치는 감사’가 터져 나온다. 우리의 작은 헌신은 도움을 받은 이의 입술을 열어 하나님을 찬미하게 하고, 공동체의 예배를 한층 깊고 넓게 만든다. 둘째, 복음에 대한 ‘순종의 증거’가 드러난다. 믿음이 생활의 구조—우선순위, 소비 습관, 시간과 재능의 배분—를 재편하기 시작하면, 신앙은 말에서 삶으로 옮겨진다. 셋째, 공동체 간 ‘영적 교제’가 강화된다. 받은 이들은 기도로 화답하고, 주는 이들은 더 큰 은혜를 사모한다. 보답할 재력이 없어도 누구나 드릴 수 있는 기도는 서로의 마음을 붙들며, 사랑—감사—기도—더 큰 은혜로 이어지는 순환을 형성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역동을 “은혜의 네트워크”라고 부른다. 한 교회의 작은 연보가 다른 도시의 찬양을 불러오고, 다른 대륙의 헌신을 일으키는 파장을 역사와 오늘의 현장이 증언한다.

이 청사진은 오늘의 교회와 성도에게도 구체적 지침을 제공한다. 가정과 교회 예산에 ‘파종 항목’을 첫 줄로 올려두라. 남으면 하는 나눔이 아니라, 먼저 떼어 심는 나눔이다. ‘즐겨 내는 마음’을 길러 줄 영적 루틴을 세워라. 감사의 기록, 안식의 리듬, 탐욕을 다루는 고백과 기도, 정기적 디클러터링과 기증 같은 작은 훈련이 마음의 근육을 키운다. 교회는 투명성을 제도화하라. 다중 서명, 독립 감사, 분기별 공개 보고, 이해상충 방지 원칙은 억지를 밀어내고 자발성을 자라게 하는 신뢰의 토양이 된다. 간증을 자주 나누라. 우리가 뿌린 씨가 어떤 식탁을 채우고 어느 가정의 눈물을 닦았는지를 공동체가 ‘보게’ 할 때, 보는 기쁨이 다시 심는 용기를 낳는다. 디지털 시대의 도구—정기 후원, 매칭 펀드, 지역 상호부조, 크라우드 펀딩, 임팩트 투자—도 유용하지만,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듯 초점은 언제나 ‘얼굴’이어야 한다. 데이터와 통계 너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억지는 사라지고 사랑이 시작된다. 사랑은 결국 “그 마음에 정한 대로” 결단하게 만든다.

두 가지 왜곡을 경계하는 것도 중요하다. 번영신학은 하나님을 거래 대상으로 만들고, 죄책감 동원은 성도를 조작 대상으로 만든다. 전자는 나눔을 계산으로, 후자는 억지로 변질시킨다. 바울과 장재형목사는 이 양극단을 동시에 거부한다. 하나님은 씨앗을 넉넉히 주시는 분이고, 우리는 자유로이 기쁨으로 심는 사람이다. 역할이 분명할수록 자유는 넓어지고 기쁨은 깊어진다. 그래서 장재형목사는 고린도후서 9장을 “복음의 경제학이며 동시에 예배의 신학”이라고 부른다. 돈의 문제가 아니라 은혜의 문제, 액수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 프로젝트의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의 문제라는 정의는 교회의 길을 똑바로 비춘다.

개인 차원에서도 기준을 새롭게 세울 수 있다. 직업과 거주, 소비와 투자 같은 큰 결정을 할 때 ‘나눔의 능력’이 확장되는가를 주요 판단 기준에 포함하라. 재정 목표의 최종 지표를 ‘더 많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흘려보내는 것’으로 바꾸라. 건강한 청지기는 수입을 늘리되 지출을 단순화하고, 단순해진 지출의 여백을 씨앗으로 환원한다. 돈만이 씨앗이 아니다. 시간, 재능, 네트워크, 격려, 노하우도 각기 다른 밭에 뿌려질 씨앗이다. 어떤 씨는 한 사람의 자존감을 세우고, 어떤 씨는 한 가정의 생계를 지키며, 어떤 씨는 한 도시의 문화를 바꾼다. 하나님은 씨앗의 종류를 다양하게 주신다. 우리의 사명은 그 씨앗을 땅에 맡기는 용기, 그리고 수확의 즐거움을 공동체와 나누는 기품이다.

결국 9장의 도착지는 15절의 짧은 영광송이다. “말할 수 없는 그의 선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바울이 바라본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였다. 부요하신 분이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가 부요하게 되었다(고후 8:9). 우리의 나눔과 헌신은 그 큰 선물에 대한 작은 답장, 작은 모방, 작은 찬양에 불과하다. 그래서 기독교적 나눔은 죄책감이 아니라 감사에서, 비교가 아니라 자유에서, 강요가 아니라 기쁨에서 시작한다. 하나님에게서 시작된 은혜가 우리 안에서 ‘넉넉함’으로 변하고, 그 넉넉함이 이웃을 향한 ‘흩음’으로 흐르며, 그 흩음이 다시 하나님께 ‘감사’로 올라가는 원형이 회복될 때, 가난한 성도는 일어나고 나누는 성도는 기뻐하며 세상은 하나님을 본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수 있다. “주님, 저를 즐겨 내는 사람으로 빚어 주십시오. 씨앗을 주셨다면 뿌릴 밭도 보여 주십시오. 보여 주셨다면 주저하지 않게 하시고, 모든 영광이 주님께 돌아가게 하소서.” 그 기도로 시작되는 작은 심음이, 고린도후서 9장이 그려 준 은혜의 강을 오늘 우리의 동네에도 다시 흐르게 할 것이다. 그 길 위에서 장재형목사의 가르침은 방향을 분명히 하고, 한 걸음을 더 내딛게 하는 담대함을 준다. 복음은 여전히 능력이며, 나눔은 그 능력이 세상에서 들리는 가장 따뜻한 음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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