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일용할 양식의 의미와 장재형 목사의 가르침
우리가 흔히 말하는 ‘주기도문’은 마태복음 6장 9절에서 13절 사이에 등장하며, 이 중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 6:11)라는 간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자주 입에 올리는 귀중한 구절이다. 그런데 많은 신자가 입으로만 암송하고 실제 삶에서는 이 구절이 어떤 의미인지 구체적으로 곱씹지 못할 때가 많다. 이를 두고 장재형 목사는 여러 강의와 설교에서 “하나님께서 실제로 떡(빵)을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을 때, 우리는 과연 그 빵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깊이 묵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즉 일용할 양식이 가리키는 구체적인 차원은 우리의 생존을 위한 물질적 필요를 포함하지만, 동시에 더 깊은 영적 가치와 하늘나라를 향한 열망까지 포괄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일용할 양식”을 말할 때 영적 양식을 떠올리기도 한다. 물론 영적인 말씀과 은혜가 절대적으로 중요하지만, 주기도문 속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일용할 양식”은 우선 매우 실제적인 차원, 곧 하루하루 먹고 사는 데 반드시 필요한 양식을 일컫는다. 장재형 목사는 “우리가 ‘영적 양식’만을 강조하면서 현실적으로 필요한 양식을 무시한다면, 그건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균형을 잃은 것”이라고 언급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마태복음 4장 4절에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하셨고, 동시에 마태복음 6장 주기도문에서는 “먹고 살 것을 구하라”고도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런 절묘한 균형 속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함께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 삶의 근본적 영적 원리이며, 그러나 하루하루 살아갈 때 꼭 필요한 빵(물질적 양식)도 하나님께 구해야 할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가 그렇게 절실한가? 장재형 목사는 신명기 8장 3절의 말씀에 주목한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만나를 내리신 목적을 밝히는데, 만나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최소한의 양식을 공급받았다는 점에서 “하나님이 실제로 우리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시는 분”이라는 진리를 깨닫게 된다. 하지만 동시에 만나 자체가 삶의 전부가 될 수 없고, 그 만나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인식하며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도록 이끄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배운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에서 “만나가 없으면 이스라엘 백성은 당장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지만, 만나만 주어지고 하나님 말씀이 없다면 그들은 광야 생활의 진정한 목적과 정체성을 잃어버렸을 것”이라고 역설한다. 결국 떡도 필요하지만, 그 떡이 단순히 물질적 풍요의 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살아있는 선물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주기도문의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는 대목은 우리가 매일 먹고 입는 경제적 문제를 하나님께 맡겨야 함을 밝히면서도, 더 나아가 그 공급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라고 명령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때 “떡은 곧 돈”이라고 비유하기도 한다. 현대 사회에서 빵이나 떡은 상징적이며, 실제로 우리 일상에서 가장 가깝게 접하는 형태는 화폐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간구 속에는 ‘매일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경제적 자원, 물질’을 달라는 기도가 들어 있다. 그렇다면 “돈을 얼마나 벌어야 됩니까?” 혹은 “얼마나 있으면 됩니까?”라는 질문이 이어질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그 요구의 한계를 정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예수님이 제시하신 기도의 취지는 “내가 일용할 만큼, 더 나아가 주변에 있는 타자를 섬길 만큼” 달라고 당당히 구하라는 것이다. 어느 정도의 물질이 적절하고 넘치는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그 중심에 놓인 정신은 ‘자기 탐욕과 사치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사랑의 실천을 위해서’ 필요한 재정을 구한다는 점이다.
주기도문은 크게 보면 먼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두 전제’로 시작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 두 전제가 주기도문의 전체 방향을 결정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 이것은 우리의 인생 목적과 존재 이유를 보여 주는데,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자신의 삶을 드리는 존재이다. 그런 점에서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지극히 당연하고도 절대적인 명령이다. 그리고 그 명령을 실제로 따르는 과정에서 우리는 “오늘 나에게 필요한 빵”을 구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일종의 “신적 우선순위의 원리”라고 부른다. 하나님 나라가 먼저이고, 그 다음에 물질이 따른다. 그러나 물질을 무시해서도 안 되며, 오히려 하나님께 담대하게 구하고, 한편으로는 그 구한 물질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 일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에서 떠올릴 수 있는 핵심 메시지가 있다. 신명기 8장 3절의 말씀처럼, 떡이 전부가 아님을 아는 동시에, 떡도 하나님이 주셔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즉 떡을 없인여기지 않고 중요하게 여기되, 그 떡이 우리의 목적이나 삶의 전부가 되는 일은 경계해야 한다. 이때 장재형 목사는 예수님께서 광야 시험을 받으실 때(마 4:1-11) “돌들이 떡이 되게 하라”는 사탄의 유혹에 어떻게 대응하셨는지를 다시금 강조한다. 예수님은 떡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으셨지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을 인용하시며 떡 위에 군림하는 말씀이 더 우선임을 선언하셨다. 이런 태도가 곧 신자의 이상적 자세이며, 일용할 양식을 구하되 그 양식이 하나님보다 우위에 서지 않게 해야 한다고 장재형 목사는 설파한다.
이처럼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기도는 신자에게 지극히 현실적인 요구와 영적인 의미가 결합된 요청이다. 한편으로는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주십시오”라고 아이가 부모에게 자연스럽게 말하듯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떡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잊지 않겠다는 신앙 고백이다. 장재형 목사는 특히 누가복음 11장에 나오는 “밤중에 친구에게 가서 떡 세 덩이를 구하는” 예화를 인용하며, 이것이 바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의 기본 태도를 보여 준다고 설명한다. 구체적으로 누가복음 11장 5절 이하에 언급된 이 이야기는, 밤늦은 시간에 집을 찾아온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간절히 빵을 구하는 사람의 모습이 드러난다. 그 시간에 찾아간다는 자체가 무례한 일일 수 있지만, 친구에게 떡을 달라고 문을 두드리는 간절함, 그리고 그것을 줄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사랑과 연대가 핵심 주제다. 결국 간절함과 사랑이 만날 때, 그 떡을 가진 친구는 문을 열고 떡을 줄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장면을 “간절한 기도가 무엇인가”를 잘 보여 주는 예라고 말한다. 마치 한밤중에 문을 두드리며 “친구여, 친구여, 떡 세 덩이만 달라”고 소리치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앞에 나가 간절히 “하나님, 오늘도 제게 필요한 것을 주시옵소서. 나뿐만 아니라 내 주변의 부족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더 많은 자원이 필요합니다”라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점은 “세 덩이”라는 표현 속에 상징성이 있다. 내가 먹을 양식 한 덩어리뿐만 아니라, 함께 나눌 양식, 이웃을 살필 양식까지 구하는 태도라는 것이다. 결국 이것이 “일용할 양식” 기도에 함축된 깊은 뜻이다. 단지 자신만의 배고픔 해결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자기를 둘러싼 타자의 결핍까지 끌어안고 함께 해결하려는 사랑의 기도다.
주님은 누가복음 11장 9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그리고 이어지는 13절에서는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하셨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에서 “성령”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큰 선물이자, 하나님의 영을 받은 신자가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그것을 나누는 삶으로 나아갈 때의 근본 동력이 된다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물질을 얻어도 그 물질을 자기 만족과 탐욕을 채우는 데 쓸 수도 있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나누고 섬기는 데 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갈림길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은 “사랑의 마음, 타인을 돌보고 배려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필수 요소다. 그래서 예수님은 단순히 ‘무엇이든 구하면 다 주신다’에서 끝나지 않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을 구하는 데까지 기도가 확장되어야 함을 밝혀 주신다.
그렇다면 실제로 어떻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또 성령을 받아 그 양식을 나눌 수 있을까? 장재형 목사는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의 예로, 마태복음 17장 24절 이하에 나오는 “성전세를 낼 돈을 물고기 입에서 찾은 이야기”를 종종 언급한다. 예수님과 제자 베드로는 성전세를 내야 했는데 마땅한 돈이 없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바다에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게 될 것이니, 그것으로 너와 나의 몫을 내라”고 명하신다. 이는 놀라운 기적이다. 그러나 이 기적은 단지 “어려울 때 하늘에서 돈이 떨어진다”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필요가 생길 때 하나님께서 그 부족을 채워 주실 수 있다는 상징을 보여 준다. 장재형 목사는 “물고기 한 마리가 한 세겔을 물고 있다”는 황당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가 헛되지 않음을 깨달으라고 한다. 인간의 계산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도 하나님이 일하시기 시작하면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다만, 그 돈을 쥐었을 때 “이것을 어디에 쓸 것인가?”의 문제, 즉 하나님 나라와 사랑의 실천을 위해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가 중요하다.
이를 종합하면,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하나님 나라가 인생의 절대적 우선순위라는 인식을 깔고 있으면서도, 하루하루 살아가는 데 필요한 실질적 요구들을 하나님께 강청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기초해 있다. 그리고 그 기도의 태도는 탐욕이 아닌 사랑과 나눔, 이웃을 향한 마음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이처럼 “돈” 자체를 구하되 “사랑”으로써 그 돈을 사용하겠다는 결단과 함께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요구대로”, 나아가 “필요 이상으로도” 채워 주실 수 있는 분이다. 그것이 누가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비유의 핵심이며, 장재형 목사가 늘 강조하는 믿음 생활의 실제적 방식이다.
2.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 기도와 사랑의 실천
누가복음 11장 9절의 말씀,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는 그리스도인의 기도 생활을 특징적으로 묘사한다. 여기서 우리는 “구하는 자”가 된다는 것, “찾는 자”가 된다는 것, 그리고 “문을 두드리는 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본문을 풀어내면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가 서로 다른 차원의 기도 단계를 보여 준다고 설명한다. 단순히 한 번의 요청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하나님께 다가가는 태도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첫째, “구하라”는 것은 우리가 가장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기도의 태도를 의미한다. 앞서 살핀 것처럼, 구체적으로 “하나님, 오늘 먹을 양식이 필요합니다. 경제적 어려움에 놓여 있습니다. 도와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자세다. 장재형 목사는 이 단계를 “아이의 심정”이라고 부른다. 아이가 부모에게 “엄마, 밥 줘”라고 조른다고 해서 그것이 불경스럽거나 낮은 수준의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부모와 자녀 사이의 자연스러운 관계를 반영한다. 그러나 많은 신자가 스스로를 판단하기를, “하나님께 이런 사소한 문제까지 구하는 것은 왠지 미성숙해 보인다”고 여겨 기도를 멈추는 경우가 있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경계하며, “예수님이 직접 떡을 구하라고 하셨으니 당연히 우리가 구해야 한다. 오히려 구하지 않는 것이 교만이다”라고 지적한다. 구체적인 삶의 필요를 솔직히 아뢰는 것이 곧 기도의 1단계다.
둘째, “찾으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표면적 필요를 넘어, 그 필요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차원이다. 가령 일용할 양식을 구하되, 단지 내 배고픔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 양식을 통해 내가 하나님 나라에 어떻게 기여하고, 이웃에게 어떻게 사랑을 나눌 것인가”라는 관점으로 나아가는 단계다. 장재형 목사는 “단순히 ‘밥을 주세요’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밥을 통해 하나님께서 내 삶을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그 의미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기도는 종종 “묵상”과 연계된다. 먹을 것을 달라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이 그 양식을 주시는 기적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과정을 통해 우리 마음이 변하고 성숙해지는 부분이라는 것이다. 결핍이나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을 찾고, 또 그 과정을 통해 우리 믿음이 자라나며, 결국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래서 이 단계가 곧 “찾는 기도”가 된다.
셋째, “문을 두드리라”는 것은 보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를 뜻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가리켜 “견고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밤중에 잠겨 있는 문을 두드리려면 상당한 용기와 간절함이 필요하다. 앞서 이야기된 비유처럼, 한밤중에 친구 집을 찾아간 사람은 결례가 될 수도 있음을 알면서도, 혹은 자신이 거절당할 수 있음을 알면서도, “친구여, 떡 세 덩이만 달라”고 간청했다. 그리고 그 친구는 마침내 문을 열고, 세 덩이 이상의 것을 줄 수도 있었다. 우리가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다. 막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 전혀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끈질기게 문을 두드리는 태도가 요구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강청함”이라고 표현하며, “하나님께 사랑의 마음으로 강청할 때, 하나님이 드디어 문을 열어 주실 것이다. 그렇게 열리는 문은 우리가 상상했던 것 이상의 은혜와 공급으로 이어진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사랑”이다. 사랑이 없는 기도는 탐욕의 기도가 될 위험이 크다. 더 많이 가지기 위해, 더 많은 성공과 부를 누리기 위해, 어떤 때는 이웃을 돌보지 않고 자기 만족을 추구하기 위해 기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1장의 “친구의 비유”에서, 그 밤에 간청하는 사람이 자기 한 사람만 배를 채우려는 것이 아니라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떡 세 덩이를 구하는 장면을 보여 주셨다. 장재형 목사는 “타인을 섬기기 위해 내가 더 많은 양식을 필요로 한다는 강청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기도”라고 해석한다. 사랑을 동기로 하는 간구,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한 간구, 그리고 이웃을 살리는 간구. 이것이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 가운데 놓인 핵심 원리다.
결국 “일용할 양식”을 구하되, 그 양식이 어디에서 왔고 왜 필요한지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 제게 떡을 주십시오. 그리고 제가 그 떡으로 이웃의 배고픔을 채워 주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이것이 장재형 목사가 제시하는 기도의 실천적 예이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주기도문의 한 대목은, 오늘날 배고픔을 겪는 이웃, 복음 전파를 위해 필요한 재정, 교회 공동체 내의 사역자와 선교사들의 생활비 등등 실제적이면서도 거룩한 목적을 품고 강청하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이처럼 기도는 단순히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사랑을 행동으로 옮기는 영적 동력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구약과 신약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발적으로 재화를 기부하거나 삶을 드린 수많은 이들의 사례를 통해 이 진리를 확인할 수 있다. 초대 교회 시대에도, 자기의 소유를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고(행 4:34-35) 공동체가 그것을 필요에 따라 나누었을 때, 교회는 놀라운 부흥과 사랑의 역사를 경험했다. 장재형 목사는 이런 예를 근거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용할 양식”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라면, 그 재화를 움켜쥐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행전 교회처럼 필요에 따라 기꺼이 내어놓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나눔 속에 진정한 기쁨과 풍요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주님이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행 20:35)고 말씀하신 뜻을 되새길 수 있다. 구하되, 나눌 목적으로 구하는 자는 누구든지 “구하는 대로 받게 될”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다.
3. 하나님 나라와 용서, 그리고 믿음의 방향
주기도문의 흐름을 다시 살펴보면, “하나님 나라가 임하옵시며”라는 간구가 먼저 나오고, 이어서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가 등장하며, 그 다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도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용서의 기도가 등장한다. 누가복음 11장에서는 조금 더 간략히, 세 가지 기도제목을 함께 제시한다. 즉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그리고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내용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기도의 세 기둥”이라고 부른다. 신자의 삶을 지탱하는 세 가지 중요한 기둥이 바로 ‘하나님 나라’, ‘물질적·영적 양식의 공급’, 그리고 ‘용서’다.
먼저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존재 이유와 궁극적 목표가 된다. 하나님은 태초에 인간을 창조하셨고, 그 목적은 “하나님 나라를 함께 이루어 가는 동역자로서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처음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부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외치셨고, 모든 가르침의 중심에 ‘하나님 나라(킹덤)’를 두셨다. 장재형 목사는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도 결국 이 하나님 나라 비전 안에서 이뤄져야 함을 거듭 강조한다. “하나님 나라”라는 거대한 그림 속에서, 나는 오늘 필요한 양식을 구하고, 그 양식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봉사하며, 또 그 가운데 기쁨을 얻는다는 순환 구조가 형성되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 나라가 빠진 채 단순히 “내 생활만 편안하게 해 주세요”라고 구한다면, 기도는 왜곡되고 말 것이다.
둘째, 용서의 문제다. 누가복음 11장 4절을 보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라는 문장이 나온다. 이는 관계의 문제이자 동시에 인간 내부의 문제다. 우리의 죄가 용서받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설 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베푸신 용서를 온전히 누릴 수 없다. 장재형 목사는 용서가 기도에 있어서 “핵심 중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물질적 필요를 아무리 채우고, 심지어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갖고 열심히 봉사한다 해도, 마음 깊은 곳에 용서하지 못함이 있다면, 그것이 결국 관계를 깨뜨리고 공동체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상처와 원망, 미움이 해결되지 않으면, 결국 자신도 죄책감이나 증오 속에 갇혀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 따라서 용서는 영적 자유로 가는 길이며, 참된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출발점이 된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용서”가 단순히 감정적 차원이나 윤리적 매너 이상의 것임을 말한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 주신 “십자가의 용서”는 인간이 전혀 감당할 수 없는 채무를 탕감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가 받은 이 거대한 은혜를 기억한다면,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할 이유가 없고, 또 그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용서”와 “우리의 용서”가 맞물려 돌 때, 주기도문의 기도는 완성도를 가진다. 실제로 “용서”가 빠진 “하나님 나라”는 정의와 공의를 외치면서도 결국 율법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고, “용서”가 빠진 “일용할 양식”의 기도는 자칫 자기중심적이고 탐욕적인 방향으로 가기 쉽다. 따라서 이 세 기둥—나라, 양식, 용서—는 서로 결합되어 온전한 신앙의 틀을 형성한다.
구체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이 땅에서 이미 하나님의 다스림이 시작된 것을 믿고, 그 다스림이 완성될 미래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자세를 의미한다. 장재형 목사는 “역사의식”이라는 단어를 종종 사용하며, “인간 역사는 결국 하나님 나라라는 결론을 향해 수렴되어 간다. 이 거대한 방향성을 이해하고 동참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신자”라고 한다. 우리가 현재의 생활 속에서 눈에 보이는 것만을 기준 삼으면, 때로는 삶의 목표가 혼란스럽고, 세상의 수많은 유혹이나 두려움 때문에 낙담하기 쉽다. 그러나 “하늘에서 이미 이루어진 것”이 반드시 이 땅에 실현된다는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는다. 그리고 그 믿음은 기도로 구체화된다. 하나님 나라를 더욱 앞당기게 해 달라,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우리 직장과 가정과 사회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달라, 이웃과 교회와 열방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나타나게 해 달라, 이런 간구가 하나님 나라를 향한 기도의 본질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와 용서의 동력 속에서 일용할 양식을 구할 때,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기적을 체험할 수 있다. 혹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언제나 필요한 만큼은 채워 주신다는 평안 속에 살아갈 수 있다. “오늘도 먹을 것이 있음”을 감사하고, 그 가운데서 조금이라도 이웃과 나눌 수 있음에 감사한다. 또한 사소한 일처럼 보이는 “밥 한 끼를 나누는 일” 속에 예수님의 사랑이 스며들 수 있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 나라의 실제적 확장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처럼 “사랑이 담긴 작은 행위들이 모여 교회를 세우고, 사회를 변혁하며, 결국 하나님 나라의 진보에 기여한다”고 누누이 강조한다.
결국 믿음의 방향이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그의 나라와 뜻이 이 땅에 실현되며, 그 과정에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이 주어지고, 서로 간에 용서와 사랑이 실천되는” 그 전 과정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우리는 이 길을 걸으며 때로 실패와 낙담을 경험하기도 한다. 물질적 풍요를 구했으나 쉽게 해결되지 않을 때가 있고, 용서를 하고 싶지만 마음이 쉽게 풀리지 않아 애를 먹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가 끊임없이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기만 한다면 결국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겠다는 약속이다. 장재형 목사는 “하나님이 태초부터 지금까지 은혜를 베풀어 오신 방식은 놀랍도록 일관되다. 그분은 기도하는 자에게 친히 자신을 나타내시고, 성령을 부어 주셔서 나누고 섬기고 용서하게 하신다”고 가르친다. 그렇기에 우리의 기도 생활이야말로 신앙 생활의 근본이며, 그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관점과 일용할 양식을 받는 은혜, 그리고 용서의 능력을 경험하게 된다.
또한 장재형 목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미사여구나 추상적 고백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의 사랑 실천”이라고 말한다. 신약성경 곳곳에서도 “말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라”(요일 3:18)는 가르침이 주어진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가정 안에서, 또 사회 안에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내 것”이라 여기는 시간, 재능, 재물 등을 들여 서로 섬길 때, 그리스도의 사랑이 증거된다. 따라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기도는 “주님, 이 양식을 가지고 세상에 나아가 당신의 사랑을 나누는 사람이 되도록 인도해 주십시오”라는 다짐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이것이 곧 우리가 삶으로 드리는 예배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돕는 통로다.
정리하면, 주기도문에서 말하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는 다음과 같은 여러 차원의 의미를 함께 내포한다. 첫째, 우리의 실제적 필요에 대한 하나님의 공급을 간절히 구하라는 뜻이다. 둘째, 그 구함 속에는 하나님 나라와 이웃을 위한 마음이 담겨 있어야 한다. 셋째, 이를 통해 용서와 사랑이 실현되어야 한다. 넷째, 궁극적으로 그 기도의 동력은 성령이시며,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 중에서 가장 귀한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신자는 사랑의 모드(loving mode)로 전환된다”고 설명한다. 처음에는 소유를 위해(having mode) 기도했을지라도, 성령의 역사 가운데 점차 ‘존재(being mode)’를 깨닫고, 궁극적으로 ‘사랑(loving mode)’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세 덩이 떡”의 비유를 통해 우리는 “나 혼자만 먹는 빵이 아니라, 함께 나누고 이웃을 세워 주는 양식을 구하는” 기도가 얼마나 귀한지를 알게 된다. 밤중에 떡을 달라고 문을 두드리는 것은, 자기 배만 불리려는 이기적 행동이 아니다. 손님을 맞이하고, 그 손님을 대접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고자 하는 사랑’이 그 문을 두드리게 했다. 이러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문을 열어 주시고, “그 요구대로 주리라”(눅 11:8)고 약속하신 대로 필요 이상의 공급을 통해 응답하신다.
요컨대, 주기도문 속 “일용할 양식” 간구는 피상적이고 일회적인 기도가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영적 습관이 된다. 우리에게 정말 절실히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만들고, 동시에 우리의 관심을 이웃과 공동체로 확장하게 만든다.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물질과 건강, 그리고 에너지들은 곧 이웃 사랑의 도구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덧붙여 장재형 목사는 “교회 역사를 돌아보면,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그분께 진심으로 기도한 사람들이 넘치도록 공급받아서 가난한 자와 복음 전하는 자들을 풍성히 도왔다. 우리가 오늘도 그 뒤를 따라 걷고 있는 중”이라고 요약한다. 결국 이런 삶의 태도가 곧“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고, 그 나라와 그 뜻을 이 땅에 실현하는” 증거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누가복음 11장 13절의 결론을 기억해야 한다.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일용할 양식을 비롯해 우리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넉넉히 주시는 분이시지만, 궁극적으로 가장 귀한 선물은 성령이다. 그 성령이 임하실 때, 우리는 단순히 내 인생의 작은 문제 해결을 넘어, 하나님 나라와 그의 공의, 그리고 용서를 실천하는 삶을 살게 된다. 장재형 목사는 “성령으로 충만해진 그리스도인은 결국 예수님이 하신 대로 섬기고 사랑하며, 용서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변화될 수밖에 없다. 그게 우리의 존재 목적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이렇듯 성령의 선물을 받게 되면, 우리가 구하는 모든 일용할 양식 역시 사랑의 통로가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매개체가 된다.
결국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짧은 기도는 신자의 생활 전반을 관통하는 중요한 신앙 고백이며 실천적 요청이다. 우리는 매일 이 기도를 암송하면서,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더욱 깊이 묵상해야 한다. 신명기 8장의 만나 이야기를 통해서도, 마태복음 6장과 7장의 가르침을 통해서도, 누가복음 11장의 “밤중의 친구” 예화를 통해서도 확인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상과 삶 전체를 돌보시며,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함께 이루길 원하신다는 사실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말씀들을 연결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그분의 나라가 임하며,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채우시는 과정을 통해, 우리의 존재가 비로소 ‘사랑의 통로’로 변모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우리가 이 원리를 확실히 붙들고, 날마다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간다면, 결코 모자람이 없을 것이며 오히려 넘치도록 풍성한 은혜를 맛볼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남기신 가르침이요, 장재형 목사가 전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다. 그리고 이러한 메시지를 실천하는 삶이란,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획하신 “하나님 나라를 함께 세워 가는 동역자”가 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