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신앙과 삶의 스승인 장재형 목사, 미국명은 장다윗(David Jang)는 약 50세 때 미국으로 건너갔다. 벌써 20년이 넘은 것 같은데 미국에 가셔서 올리벳대학교(Olivet University)도 세우시고 여러 일을 하셨다. 사순절 묵상집을 읽어보며 잠시 추억을 해본다.
이제 20년이 흘렀으니 할아버지가 되신 거다. 70세가 넘은 목사의 설교를 묵상하면 중년이 되어 경험이 쌓인 나에게도 다가온다. 2003년이면 장 목사가 50대 초반 같은데 나랑 거의 비슷한 나이게 미국으로 건너가 사순절에 설교한 것들을 정리한 것이니 설교가 나에게 더 다가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지도 모른다. 사순절 전이지만 나는 미리 장재형 목사의 사순절 묵상집을 통해 묵상을 시작했었다.
요12장
12: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12: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12: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12: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12: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어제에 이어 이 장면을 들여다보고 있다. 장재형 목사도 십자가의 길에서 이 장면을 깊이 조명하고 있다. 새벽에 눈을 떠 이 장면을 생각해 봤다. 베다니라는 지역의 한 문둥 병자가 사는 집이었다고 나오는 데 요 12장에는 이곳에 나사로가 있었다고 했다. 나사로는 누군가?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인데 이 사람이 죽었다. 나사로를 살려달라고 예수님께 간 마리아였지만 이를 들으시고 예수님은 바로 오지 않으셨다. 그곳에서 이틀을 유하시고 나서 나사로를 살리셨던 예수님이다. 이건 부활절에 봐야 하는 거다. 그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도 이 자리에 함께 제자들과 앉아 있다.
여기에 한 여인의 이름이 마리아라고 나온다. 다른 복음서에는 죄인 한 여인이라고 나오는 요한은 구체적으로 그 여인이 누구인지 기록했다. 그리고 제자들이, 어떤 이들이라고 기록했지만 요한은 예수님께 향유를 붓는 장면을 보고 이것을 가깝다고 질책한 이의 이름을 유다라고 기록했다. 당시 하루 품 삯이 1데나리온이었으니 삼백 데나리온은 그냥 평범한 사람 1년 치 연봉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꽤 비싼 향유를 깨뜨려 예수님께 붓고 눈물로 예수님의 머리털을 닦아주는 여인의 행위를 보면서 유다가 한 생각은 이런거였다.
12: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유다의 이 생각은 맞을 수도 있다. 가난한 자들을 잘 도와야 한다. 예수님의 공동체에 돈 궤를 맡은 자는 유다였다. 그만큼 수에 밝은 사람이었을 거고 수위 총무 역할을 하던 자였으니까 똑똑했고 믿을만했을 거다. 우리가 믿을 수 없는 자에게 돈을 맡기지 않지 않은가?
12: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
그런데 요한은 고발한다. ‘이놈은 도둑놈이었다’
우리는 살다 보면 사람들을 속이기도 하고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있음에도 대단한 것인 양 으스대기도 하고 초라한 꽃 같은데 태양 같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인간에게는 양심이라는 게 있다. 나중에 유다는 양심에 찔려 후회를 한다. 하지만, 이런 양심에 구멍이 뚫린 자들도 있다. 에리히 프롬은 이런 사람들을 ‘나르시시스트’라고 했다. 자기애성 인격장애를 말한다. 이 사람들은 흔히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서 자신의 자존감이 무너 질대로 무너진 사람들이다. 자신의 나약함을 숨기기 위해 스스로를 포장한다. 이 포장 기술이 나날이 발전해서 결국에는 주위 사람들도 그가 나르시시스트라는 것을 눈치 못 채고 그 사람에게 끌려다니게 된다.
한 철학자가 말했다. 철학자는 누구인가? 지혜자는 누구인가? 사람들은 모두 동굴에 들어가 동굴 벽을 보고 절대로 뒤를 돌아 볼 수 없게 도구로 목이 고정되어 있는 상태라는 거다. 이 사람들이 처한 곳이 어떠한 곳이고 뒤를 돌아 동굴 밖으로 나오면 아름다운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게 철학자라고 했다.
그런데 철학자는 동굴의 벽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게 다가 아니다. 너희가 바라보는 건 동굴 벽이라고 말해주면 동굴에 살던 사람들은 맞는다고 할까? 비난하고 거짓말이라고 할 거다. 왜냐면 평생을 그것만 보고 살아왔으니 당연한 거다.
내 주위에도 나르시시스트 여럿 있다. 에리히 프롬은 자유를 중요하게 생각한 사람인데 나르시스스트는 양심에 구멍이 뚫려 있어서 자신을 돌아볼 능력이 없고 미끼를 던져 물린 사람은 그 자의 먹잇감이 된다는 거다. 철자하게 자유를 억압하고 그를 동물 키우듯 그렇게 조련하게 된다는 건데 이 철학자가 보기에 이런 나르시시스트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악한 위치에 있는 자라는 거다. 왜냐? 상대를 감정의 쓰레기통으로만 생각하고 그 사람의 자유를 박탈해서 가스라이팅을 하기 때문이다. 양심이 없기 때문에 반성이 없다. 끔찍한 유형의 사람이다. 이 사람들을 어찌할까? 현재로서는 그냥 무시하고 멀리 떨어져 지내다 보면 그 사람들은 우울증에 걸려 죽는다고 한다. 스스로는 가장 행복할 거다.
양심을 이야기하다 보니 갓길로 빠졌는데 우리는 양심이 있다. 이 양심은 우리게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것이다. 유다에게도 양심이 있었다. 그가 한 행위는 사랑의 배반이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다. 공익을 위한다. 너를 위한다. 교회를 위한다. 등의 구호 아래 행해지는 유다와 같은 행동들이 얼마나 많은가? 누굴 비판하는 직업을 가진 자들은 스스로를 돌아 볼 수 있는 능력이 뛰어나야 한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 사람이라 해도 어떻게 그런 걸 못하게 하겠는가? 이게 요즘 내가 생각하는 고민 중 하나이다. 이 나르시스스트, 양심이 없는 자를 어떻게 할 것인가?…
유다는 복음을 봤다. 그 여인의 행동이 복음이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리는 것, 이것을 아깝다고 생각했다. “저걸 빼앗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데”
은 30은 노동자의 하루 품 삭인데 10-20만 원 정도라고 보자. 그가 돈에 욕심이 있었다면 예수님을 더 좋은 가격을 받고 팔려고 했을 거다.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고 했던 탐욕스러운 인간 아닌가? 그런데 그는 예수님의 몸값을 흥정하지 않았다.
“내가 예수를 팔 테니 얼마 줄래?”
“은 30냥”
“그래. 좋아”
이런 대화였을 거다. 얼마나 무미건조한가. 예수님을 판 것은 그가 돈이 욕심나서 스승을 판 게 아니다.
자 보라.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인이 행한 행위가 전파되고 알려질 거라고 했다. 이 장면은 복음을 그린 장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유다는 그 복음을 돈으로 계산한다. 예수님 또한 복음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돈으로 계산한 거다. 예수님의 공동체에 있으면서 그가 사도가 되었고 그는 돈으로 모든 것을 계산하고 자기 탐욕에 빠진 자이다. 단테는 신곡에서 지옥을 9단계로 그렸는데 가장 아래 지옥에 있는 자는 배반자들의 지옥이라고 했다. 탐욕스러운 배반자들이 가는 곳을 그린 것인데 탄 데는 이들을 지옥의 맨 밑 바닥에서 타락한 천사 루시퍼에게 처참하게 물어 뜯김을 받는 벌을 받는 모습으로 그려놨다.
마26장
26:14 그 때에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26: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26:16 저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장재형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매우 슬프고 비극적인 이야기다. 인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 예수님께서 지극히 사랑했던 한 제자에 의해 노예처럼 팔리는 장면이다’
유다의 말을 다시 보자.
12: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 말은 지극히 맞는 말이다. 정말 논리적이고 근사한 말인데 이 말은 사단의 말이다. 사랑이라는 건 논리적이지 않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시고 드러내신 사랑이라는 건 우리의 이성으로는 파지할 수 없다.
마27장
27:4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27: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이것이 나를 파괴한 돈이구나. 나를 망하게 하는 돈이구나. 더러운 돈이다’ 이게 유다의 외침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유다는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갔어야 했다. 왜 그가 주님께 돌아가지 않았나?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주님께서는 그를 사랑하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주님의 사랑을 온전히 알지 못했던 것이다. 원수까지도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알지 못했기에 스스로 죽은 것이다’
우리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는 게 아니라 지식의 나무의 열매가 아니라 사랑의 열매를 따 먹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주님 안에 온전히 거해 믿음 위에 서서 죄를 범하지 말자.
오랜만에 스승 장재형 목사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본다. 영어 이름, 장다윗 목사를 홈페이지 주소로 해두어서 기억하기가 쉽다.
사진을 보면 많이 젊으시다. 이때가 약 20년 전인 것 같은데… 장다윗 목사님을 알고 함께한 시간이 25년이 되어 가면서 내 스승도 늙으셨고 나도 나이 들어간다. 우리 부모님 보다 더 자주 연락하고 대화하는 사이가 되었다. 랄프 D 윈터 박사의 기념 도서관 앞에서 저렇게 사진 찍은 게 20년 전 같다. 이때 50세 정도인데 지금 내가 어느덧 50세가 다 되어 간다. 시간이 살처럼 빠르게 지난다.
이 박사님은 얼마 전 소천하셨다 사모님은 건강하신지… 댁에 가면 중국집에 가서 맛있는 거 사주시고, 오리구이를 사주시고 우리 아이들 이름을 기억하셔서 호두과자도 사주셨는데… 사랑하는 이를 주님 곁으로 보낸 사모님은 몇 년 새 많이 수척해지셨더라. 미국 뉴욕에 가셔서 사진 찍으신 것 같다. 이 박사님의 박사 가운도 나에게 주셨는데 세탁을 다시 해서 잘 보관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