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의 신비 – 장재형 목사

Ⅰ. 아담으로부터 전가된 죄와 인간 실존의 문제

로마서 5장 12절부터 21절까지는 바울이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를 대조하고, 이 둘이 각각 인류를 죄와 사망 안에 혹은 의와 생명 안에 묶어 두는 ‘대표’가 된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핵심 본문이다. 장재형 (장다윗)목사는 이러한 텍스트를 해설할 때, 특별히 “한 사람이 죄를 지음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이 순종함으로 많은 이가 생명을 얻는다”는 논리를 통해 복음의 능력과 ‘연대성’의 중요함을 설파한다. 이 대목은 기독교 신학의 중요한 문제인 원죄론(原罪論)과 직결되는데,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죄가 전가된 까닭이 바로 아담 한 사람에게서 비롯되었다고 가르친다.

일반적으로 현대인은 “아담이 죄를 지었다고 해서 왜 내가 죄인인가?”라는 저항감을 느낀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보편적인 죄성(sinfulness), 즉 본질적으로 죄를 떨칠 수 없는 상태가 처음 사람 아담의 불순종에서 기원한다고 선언한다. 장재형 목사는 “우리가 체감하는 현실이 하나님이 원래 계획하신 에덴의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며, 사망이 왕 노릇하는 부조리하고 폭력적인 세계라는 점은 이미 우리가 영적으로 죽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사망의 시작이 아담의 죄로부터 왔음을 성경이 증언한다”고 설명한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아담이 하나님 말씀을 불신함으로써 불순종에 이르렀고, 그 불순종이 죄의 문을 열어 사망과 파멸이 들어오게 되었다. 따라서 아담이 대표로서 지은 죄의 결과로 모든 후손이 죄의 성향에 감염되었으며, 이는 인류가 보편적으로 겪는 고통과 죽음의 근본 이유가 된다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인간이 실제로 죄를 짓고 있음에도, “왜 성경은 인간이 죄가 없다고 항변할 수 없음을 이렇게까지 강조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답변한다. 죄와 사망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은 단순히 도덕적 잘잘못을 넘어선 ‘존재론적 상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직 살아 있으니 죽은 것이 아니다”라고 여길 수 있지만, 바울은 영적·궁극적 차원에서 이미 인간이 사망 안에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원죄는 모든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죄의 굴레이며, 우리는 태어남과 동시에 하나님의 뜻과 무관한 부패한 세계에 속하여 살아간다.

바울은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율법이란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명들을 가리키는데, 이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도 죄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단지 사람들은 법이 명시적으로 있지 않으니 죄인지 아닌지 분명히 인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이나 아담이 금단의 열매를 먹은 사건이 명백히 죄악인 것처럼, 율법이 존재하기 전부터 하나님을 불신하고 불순종하는 행위는 이미 죄였다는 의미다. 인간의 양심이 자연스럽게 ‘살인, 반역, 불순종이 잘못’임을 알게 해 주지만, 구체적으로 율법이 등장함으로써 죄가 ‘법적·공식적’으로 규명된다. 그럼에도 율법은 인간을 죄로부터 완전히 해방시키지 못한다. 율법은 죄를 ‘죄’로 밝히 드러내는 기능이 있지만, 죄 자체를 제거하거나 구원을 주는 능력은 없기 때문이다.

바울은 계속해서 아담에서 모세까지, 곧 율법이 주어지기 전의 시기를 언급하며 사망이 ‘왕 노릇했다’고 주장한다. 사망이 마치 독재자 같은 권세로 온 인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죄의 노예가 되었다”는 바울의 표현을 상기시키며, 모든 사람이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죄와 죽음의 횡포를 직면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두고 “죄와 죽음의 구조적 지배, 곧 모든 사람이 율법이 없어도 어딘가 모르게 죄와 사망에 예속되어 있다는 점”을 현대인에게 쉽게 설명한다. 사회구조나 개인의 도덕적 취약성만이 아니라, 더 깊은 차원에서 인류 전체가 ‘죽음의 힘’ 아래 묶여 있음을 지적하면서, 이는 결국 우리가 에덴동산에서 끊임없이 추방된 상태로 살고 있음을 증명하는 역사적 사실이라 해석한다.

성경은 아담을 가리켜 ‘오실 자의 모형’이라고도 일컫는다. 아담이 인류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처럼, 그리스도 또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두 번째 혹은 마지막 아담’의 역할을 감당하실 분이란 뜻이다. 그렇기에 로마서 5장 14절에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고 선언한 바울의 말은, 첫 사람 아담이 죄의 시조(始祖)로서 모든 후손에게 죄와 죽음을 전가시켰듯이, 앞으로 오실 분(그리스도)은 거꾸로 모든 믿는 자에게 의와 생명을 가져다줄 것임을 내포한다. 장재형 목사는 설교에서, “우리는 매일 자기 의지대로 ‘내 삶’을 영위한다고 생각하나, 사실은 아담의 영향력을 지니고 태어나 죄에 이끌려 살 수밖에 없는 운명 속에 있다. 하지만 또 한 분, 새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지배를 깨뜨리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가져다주신다”라고 강조한다. 이 지점이 바로 바울의 강력한 복음 선언이며, 죄와 죽음의 압도적 현실에 새로운 돌파구가 열린 지점이다.

율법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는 목적, 즉 죄의 실체를 더 선명히 드러내기 위해 들어왔다고 바울은 말한다(로마서 5장 20절). 이것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는 유명한 진술과 이어진다. 아무리 죄가 쌓여 있고 사망이 모든 인생을 집어삼켜도, 은혜는 그보다 더 큰 권능으로 임한다는 의미다. 장재형 목사는 “인간이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는 죄의 굴레가 바닥까지 드러날수록,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광대하고 강력한지 더욱 부각된다”라고 해설한다. 다시 말해, 율법이 죄를 명백히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죄인인 우리는 더 큰 죄책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히지만,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펼쳐진 은혜의 세계가 얼마나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해 온 인류가 죄인 되었다는 선언은, 개별주의적 사고방식이 강한 현대 사회에서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그러나 성경은 거듭해서 ‘연대성’을 강조한다. 공동체적 사고방식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국가의 대표가 어떤 조약을 맺으면 그 국민 전체가 영향을 받는다”라는 예시를 들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이는 고대 근동의 역사적·사회적 배경에서도 ‘한 사람’이 대표성을 가질 때 그 영향이 전체로 흘러간다는 인식을 당연시했던 것에서 기인하기도 한다. 장재형 목사는 원죄에 대한 거부감이 큰 이들에게 “이 해석은 궁극적으로 ‘새 아담이신 예수께서 이루신 의와 생명이 어떠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전가되는가’를 설명하는 열쇠가 된다”고 역설한다. 즉, 우리가 동의하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이 대표성과 연대성의 원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복음이 제시하는 구원의 논리도 동시에 거부될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

원죄론은 인간이 선천적으로 어쩔 수 없이 죄의 지배 아래 있음을 말한다. 이는 애당초 인간의 자유의지와 선행으로는 결코 완전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우리는 모두 태어날 때부터 죄의 구속 안에 있어, 윤리적·도덕적 선행만으로는 참된 의에 도달할 수 없다. ‘결코 우리 힘만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라는 것이 개신교 구원의 핵심이며, 장재형 목사의 설교 역시 이런 관점에서 “원죄론을 회피하지 말라”고 호소한다. 이것은 인간의 나약함이나 무가치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이 얼마나 절대적이고 값진가를 드러내기 위함이라는 점을 명백히 밝힌다.

따라서 첫 소주제의 결론은 명료하다. 아담을 통해 시작된 죄와 사망은 이미 인류를 장악해 버린 거대한 실존적 문제이며, 율법은 그 죄를 부각시키고 심판을 선언함으로써 우리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하지만 이러한 절망적 상황이 곧바로 희망을 가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죄가 드러남으로써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혜와 구원의 능력에 눈을 뜨게 된다. 그렇기에 아담으로부터 전가된 죄가 불편하고 불합리하게 느껴질지라도, 이것이야말로 인간 실존의 단초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이해하는 필수적인 시작점이다. 장재형 목사는 “아담이 펼쳐 놓은 죄의 세계가 너무나 견고해 보이지만, 하나님은 이것보다 더 강력한 은혜의 계획을 숨기고 계셨다”고 역설하면서, 곧이어 두 번째 소주제인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의의 전가로 독자를 인도한다.

Ⅱ.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의의 전가

바울은 로마서 5장 15절부터 19절 사이에서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조를 정교하게 펼쳐 나간다. 한 사람(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죄와 사망이 인류에게 왔다면, 다른 한 사람(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인해 의와 생명이 전해진다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설교와 저술에서 이를 두고 “원죄(Original Sin)가 아담을 통해 전가되었듯, 이제는 그리스도의 의(Original Righteousness)가 우리에게 전가되었다”고 풀이한다. 이렇게 전가된 의를 교회 전통에서는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 교리’와 결부시킨다.

여기서 말하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은 십자가에서의 대속(代贖) 희생을 의미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45절 이하에서도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그리스도)을 비교하며, 첫 아담은 ‘흙에서 났고’ 마지막 아담은 ‘하늘에서 나셨다’고 선언한다. 첫 아담이 생령(a living being)이 된 것에 비해 둘째 아담, 곧 예수는 살려 주는 영(a life-giving spirit)이 되신다. 생령은 스스로 생명을 누리는 존재이지만, 살려 주는 영은 그 생명을 다른 이에게도 전할 수 있는 근원을 지닌 존재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를 살려 내는 능력’임을 강조한다. 장재형 목사는 “그리스도의 순종은 단순한 도덕적 모범을 보여 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죄에 빠진 인류를 영원히 살려 내는 생명의 근원이요,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결정적 사건”이라고 요약한다.

원죄론에서 시작된 ‘전가 사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서 ‘의의 전가’로 확장된다. 아담이 죄를 인류에게 전가시킨 것은 대표성에 따른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이루신 의를 전가해 주시는 것도 동일한 법리로 이해된다. 대표이자 머리이신 분이 이루신 일의 결과가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에게 그대로 미치는 것이다. 이때 장재형 목사는 “대표와 연대라는 개념은 성경 전체에 흐르는 중요한 원리로, 우리가 불합리하다고 생각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애초에 인류를 공동체적 존재로 창조하셨다. 한 몸, 한 계보, 한 공동체라는 의식이 기독교적 세계관 속에서 매우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이라고 역설한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인간의 무력함을 드러내는 율법 이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다. 율법이 죄를 규명하되 그 죄를 해결하지는 못한 반면, 예수는 죄의 형벌을 친히 짊어지시고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길을 여셨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3장 24-25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다”라고 선언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에서 세 가지 이미지를 인용한다. 첫째, 노예시장에서 자유를 사 주듯 값을 치르고 노예를 해방하는 ‘속량(redemption)’의 관점, 둘째, 법정에서 죄 없다고 선언되는 ‘칭의(justification)’의 관점, 셋째, 제사와 관련해 대신 희생 제물이 되어 죄를 없애 주는 ‘속죄(atonement)’ 혹은 화목제물(propitiation)의 관점이다. 이 모든 비유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안에 동시에 담겨 있으며, 이것은 바로 예수께서 인류를 대표하여 흘리신 피와 순종에 근거한다.

성경 곳곳에 나타나는 ‘복의 연대성’ 역시 예수의 순종을 통해 결정적으로 완성된다. 이미 구약에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실 때, 하나님은 그와 후손을 통해 ‘열방이 복을 받으리라’고 약속하셨다. 이 언약은 아브라함 한 사람에게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의 계보를 타고 이스라엘 민족 전체, 나아가 온 세계에 이르는 복의 연속성을 말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에 대해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이 신약 시대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성취된다. 예수께 속한 모든 자, 그분을 믿는 모든 자에게 복이 연대적으로 전달된다”라고 풀이한다. 그러므로 예수의 순종이 역사적 사건으로 한 번 일어났으나, 그 효력은 시공간을 초월해 모든 믿는 이에게 동시에 적용된다.

그러나 이 의의 전가는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faith)을 통해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이 중요한 부분이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선언한다. 이는 대표이신 예수와 우리의 개인적 연합(union)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장재형 목사는“결국 아담에게 태어나며 자연적으로 들어온 죄는 우리의 동의 여부와 상관없이 적용되지만, 예수의 의는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가된다”고 설명한다. 이것이 은혜의 역설이다. 인간은 죄를 유전적으로 물려받으면서 여지없이 죄인으로 태어나지만, 동시에 예수께서는 은혜로 우리에게 의를 선물로 내미신다. 그리고 이 선물을 받는 길은 믿음을 통해서이며, 이는 결코 우리의 공로나 노력으로서가 아니다.

바울이 말하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 것 같이, 은혜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는(로마서 5장21절) 구절은, 결국 아담의 불순종보다 더 강력한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이 왕권을 바꿔 놓았음을 선포한다. 이전에는 사망이 군림했으나, 이제는 은혜가 군림하게 되었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두고 “복음은 단순히 죄를 씻기는 차원을 넘어, 완전히 새로운 지배 체제를 우리 안에 가져온다. 우리가 더 이상 죄에 종속된 백성이 아니라 ‘생명’이라는 왕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다는 점이 핵심”이라고 말한다.

로마서 5장 18-19절에서 바울은 “한 사람(아담)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 같이, 한 사람(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 선언한다. 이 대목을 장재형 목사는 가장 결정적인 요약 구절로 꼽는다. 이 말씀은 죄와 사망의 보편성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동시에 더욱 강력한 의와 생명의 보편성을 선포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이 주는 혜택을 아무도 방해할 수 없으며, 그 능력과 권세는 처음 창조 때부터 인류를 탄생시킨 하나님이 친히 계획하신 ‘종자(種子)의 개량’에 비유될 수 있다. 불순종의 씨가 죽음과 썩어짐을 거두었다면, 순종의 씨는 의와 생명을 거두게 만든다는 해석이다.

구약 이사야서 53장에 나오는 고난받는 종의 예언 역시 같은 논리를 예시한다. “그가 질고를 당하고 죽으나, 씨가 생겨날 것이다. 이 ‘고난의 종’의 죽음을 통해 새로운 자손, 새로운 민족이 탄생할 것이다”라는 구절(이사야 53장 10절)은 단지 육적인 후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받는 종의 대속적 사역으로 탄생할 ‘영적 후손들’, 곧 메시아를 믿고 따르게 될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말씀을 “종자개량론”이라고 부르며, 우리가 아담에게서 죄와 사망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다면, 이제는 그리스도에게서 의와 생명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새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음을 뜻한다고 강조한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라는 구절은 이를 신학적으로 집약한다. 우리는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났으나, 예수와의 연합을 통해 그리스도의 후손, 곧 의와 생명으로 사는 자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 두 번째 소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그로 말미암아 전가된 의가 어떻게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며, 새로운 생명의 차원을 열어 주는가에 대한 답변이 된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시작된 죄와 사망의 왕국에 속한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 은혜와 생명의 왕국으로 옮겨진다는 것이 요점이다. 그리고 이는 믿음을 통해 개인의 삶 속에 적용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 놀라운 진리를 단순한 교리 지식으로만 이해하면 안 되고, 매일의 삶과 신앙실천에서 실제로 체화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제는 죄가 아닌 은혜가, 사망이 아닌 생명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자유와 해방을 실천적으로 강조한다.

Ⅲ. 대표이론과 연합이론의 실제적 의미

로마서 5장 12-21절이 보여 주는 핵심 구조는, 인간 역사를 아담과 그리스도라는 두 인물을 통해 해석한다는 점이다. 이는 신학적으로 ‘대표이론(Doctrine of Representation)’ 혹은 ‘연방주의(Federal Headship Theory)’라고 부르는데, 아담은 인류의 머리(federal head)로서 죄를 전가시켰고,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로서 의를 전가시켰다는 설명이 여기에 해당한다. 또 다른 관련 개념으로는 ‘연합이론(Principle of Corporate Solidarity)’이 있는데, 이는 우리가 아담과도 연합되고 그리스도와도 연합된 존재라는 성경의 가르침이다.

장재형 목사는 “한 개인이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우리 일상에서도 볼 수 있다. 국가 원수가 외교 협정을 맺으면 그 결과가 모든 국민에게 적용되듯, 가족의 대표가 한 번의 결정으로 가계를 파탄시키거나 부흥시킬 수도 있는 것과 같다”면서, 이 대표와 연합의 신학적 원리가 결코 관념적인 주장이 아님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실제로 구약에 나타나는 예: 고라의 반역과 그 가족 전체의 멸망, 아간의 범죄와 그와 관련된 모든 자들의 처벌 등은 죄가 단지 개인의 문제에서 끝나지 않고 공동체에 연대적으로 이어짐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 이처럼 죄와 징벌, 복과 축복이 특정 인물을 통해 전체로 파급되는 구조는 고대 공동체 사회에서도 당연하게 여겨졌다.

이 원리는 동시에 복음의 핵심을 설명하는 열쇠이기도 하다. 아담으로 인한 저주가 어떻게 모든 인류에게 미쳤는지 이해한다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이 어떻게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가를 이해하기도 쉬워진다. 대표자가 행하는 일에 나머지 구성원들이 연대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장재형 목사는 “대표성과 연합이라는 말을 우리가 현실 감각으로 이해해야 한다. 개인주의가 팽배한 오늘날, 모든 것을 ‘나와 하나님’만의 관계로 생각하기 쉽지만, 성경은 철저히 공동체적 연대를 전제한다. 우리는 태초부터 아담 속에 있었고,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었다.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바울의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는 예수의 선언(요한복음 15장)을 인용하며, 우리 인생은 어떠한 ‘나무’에 접붙여지느냐에 따라 그 열매가 달라진다. 아담의 나무에 접붙여져 있으면 죄와 사망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지만, 그리스도의 나무에 접붙여지면 의와 생명의 열매를 거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abide)’는 표현은, 단순히 교회에 다니거나 예배에 참석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실제로 그의 생명력과 능력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도록 ‘연합’을 이루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연합이론은 신학적 지식을 넘어 우리의 실존을 변화시키는 실제적 힘을 지닌다. 내가 아담에 속했을 때는 죄가 당연했다.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되면 그분의 의, 그분의 사랑, 그분의 능력이 나에게 흘러 들어와 내가 전혀 다른 존재로 살아가게 된다”고 설파한다.

대표이론과 연합이론을 다시 한 번 강조할 때, 우리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고백을 자주 인용한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라고 선언한다. 이는 예수와의 연합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한 예다. 옛사람(아담에게 속한 자로서의 나)은 이미 예수와 함께 죽었고, 이제는 예수의 생명이 내 안에서 움직이고 있음을 말한다. 이렇게 보자면, 기독교 신앙은“예수 믿고 천국 간다”는 차원을 넘어, “지금 이 순간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간다”는 변화된 자기 이해를 요구한다. 장재형 목사는“이 자기 이해가 실제 삶을 변화시킨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나는 아담에게서 왔기에 어쩔 수 없는 죄인’이라며 자포자기하지 않고, ‘나는 이미 그리스도와 연합된 의인’이라는 정체성을 붙들게 된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주는 힘”이라고 강조한다.

성경에서 대표와 연합의 개념을 다른 예로 들자면, 아브라함을 통해 복이 열방에 흘러간다는 약속, 엘리야가 기도했더니 온 땅에 비가 오지 않고 또 기도해서 비가 내리는 역사가 일어났다는 예가 있다. 아브라함과 엘리야는 개인이지만, 그들이 받은 언약과 기도의 능력이 연대적으로 주위에 확산된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가 신약의 결정적 대표가 되어 우리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죄의 짐을 대신 지셨고, 그 결과 우리에게는 그분의 의와 생명이 연대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이 신약 복음의 정수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목회 현장에서 “교회야말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머리 대신 주님과 연대하여 그분의 생명과 은혜를 실천하는 공동체”라고 재해석한다.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가 확산되고, 또 교회는 서로가 서로의 짐을 지며, 함께 기도하고 예배하는 연대적 삶을 보인다. 이 모든 것이 대표성과 연합의 테두리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표이론과 연합이론은 어떤 실제적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 첫째, 자기정체성의 변화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아담의 후손이었으나, 예수를 믿게 될 때 즉시 그리스도의 후손이 된다. 스스로 죄에 중독되어 있고 어쩔 수 없는 죄성에 빠져 있다고 느낄 때라도,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자라는 의식이 마음에 확고히 자리 잡으면, ‘더 이상 죄가 내 인생을 주도하지 못한다’는 해방감을 갖게 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 해방감이야말로 복음 생활의 출발점임을 거듭 강조한다.

둘째, 우리 안에 동반되는 소속감과 공동체성이다. 아담 안에서 우리가 모든 인류와 연결되어 있듯, 그리스도 안에서도 모든 믿는 자가 연결되어 있다. 성도들은 개개인이 흩어진 섬이 아니라, 한 몸으로 서로에게 지체가 된다. 이 연대적 교회관은 지극히 성경적이며, 바울이 에베소서나 고린도전서 등에서“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지체”라고 선언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장재형 목사는 “대표이론과 연합이론을 이해하면, 교회 생활의 이유와 동기가 더욱 분명해진다. 우리는 한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 있어야 영적인 영양분을 공급받고, 또 지체들끼리 상호 의존하며 성장해 가는 존재다”라고 가르친다.

셋째, 죄에 대한 새로운 태도다. 과거에는 죄가 자연스럽고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면, 이제 대표가 바뀐 이상 죄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고 본다. 물론 여전히 우리는 이 땅에서 죄의 유혹을 받고 실수도 하지만, 우리의 정체성은 아담 안에 있는 죄인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인이라는 점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죄를 향해 단호하게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고, 회개를 통해 즉시 하나님 앞으로 달려갈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장재형 목사는 이것을 두고 “성화(sanctification)의 여정에서 큰 동력이 되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가 나를 대신해 죽으셨으니, 나도 죄에 대해 죽은 자로 여기며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 설명한다.

결국 대표이론과 연합이론은 매우 추상적인 교리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일의 신앙생활에 깊이 관여한다. 우리가 교회로 모여 예배하고 성찬을 나누며,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공적으로 선언하는 모든 신앙 행위가 이 이론과 직결된다. 장재형 목사는 설교에서 “아담이 우리의 옛 머리였다면,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시다. 머리가 바뀌면, 그에 따른 통제와 질서, 가치관도 바뀐다. 이 사실을 마음 깊이 깨닫고 실천할 때, 우리는 죄와 사망에서 벗어나 은혜와 생명의 통치 아래 살아가는 진정한 자유를 맛보게 된다”고 역설한다.

로마서 5장 마지막 구절인 20-21절에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는 말씀이 등장한다. 이는 바울이 마지막으로 울려 퍼지는 은혜의 찬양을 표현한 구절이다. 어느 누구도 사망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던 인류에게,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은 새로운 문을 열었다. 바울은 이를 가리켜“마치 춤을 추듯이 은혜와 생명을 찬양하는 노래”라고 볼 수 있다. 장재형 목사 역시 이 본문을 강해하며 “죄가 극심하다고 절망할 때, 오히려 은혜가 더욱 크게 임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순종과 의의 전가로 말미암아 죄의 억압에서 벗어났으며,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인류 역사상 가장 혁명적 소식이다”라고 선포한다. 낡은 세계가 지나가고, 그리스도 안에서 전적으로 새로운 질서가 도래했음을 밝히며, 이 사실이 개인과 교회와 세상에 어떠한 변화와 소망을 가져다줄지를 실제적·구체적으로 묵상하자고 권면한다.

결국 이 본문의 핵심 메시지는 분명하다. 아담이 열어 놓은 죄와 사망의 역사 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의와 생명의 새 역사를 여셨다는 것이다. 이는 신학적인 관념이 아니라, 실제로 이 땅을 살아가는 신자들의 삶을 전복적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며, 아담에게 속했던 과거의 나는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새로운 나로 매일을 살아가게 만드는 동력이다. 대표이론과 연합이론이 말하듯이, 우리는 내 힘이나 내 능력으로 죄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내 대표이신 예수께서 이미 승리하셨고, 그 승리를 내가 공유 받음으로써 의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진리야말로 복음의 정수이며, 기독교 신앙의 엔진”이라고 부르며, 로마서 5장 12-21절을 통해 믿음의 길을 걷는 모든 이가 죄를 넘어서는 자유와 생명, 그리고 감사와 찬양의 삶으로 나아가길 권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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