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목사  – 유다가 떡을 받고 떠난 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요한복음 13장 20-30절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과, 그중 하나였던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결정을 최종적으로 굳히게 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이 본문에는 예수님과 제자들 간의 긴장감, 예수님께서 가지신 극진한 사랑, 그리고 제자들이 쉽게 알아차리지 못한 비극적 결말의 씨앗이 교차한다. 특히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요 13:30)라는 문장은,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히 사건의 시점을 설명하는 것 같지만 실은 깊은 영적 함의와 인간 내면의 비극을 동시에 드러낸다. 장재형목사는 이 말씀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에서 드러난 사랑의 권면과 유다의 배반이 갖는 영적 의미를 끊임없이 묵상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아래에서는 본문의 배경, 상황 전개, 예수님의 심정, 유다의 대응, 그리고 우리가 이 본문을 통하여 어떻게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할 것인가를 정리해 보겠다. 또한 장재형목사의 통찰을 바탕으로 본문을 깊이 살피면서, 그가 강조하는 주님의 사랑과 권면, 그리고 인간 내면의 강퍅함 사이에서 일어나는 안타까운 충돌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나누신 이 장면(요 13장)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공관복음서(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서도 최후의 만찬 장면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제자들과 떡과 잔을 나누셨다는 사실로 묘사되며, 이는 성찬의 기원이 된 사건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다른 세 복음서와 달리 보다 심도 있는 신학적 해석과 예수님의 말씀 묘사에 집중한다. 특히 요한복음 13장에서는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그 이후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는 예수님의 선언이 연결되어 나오는데, 이 내면에는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끝없는 사랑과, 동시에 그 사랑을 끝까지 밀어내는 유다의 배반이 대비되어 있다.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이 장면에 대해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행위’와 ‘사랑의 말씀’이 동시에 드러난다고 지적한다. 즉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요 13:14)고 권면하심으로써, 제자 공동체가 서로 사랑으로 섬기게 하셨다. 그런데 이 사랑의 분위기 한가운데, 예수님은 자신의 배신자가 제자들 중 한 명이라는 선언을 하신다. 사랑으로 가득해야 할 만찬 자리에 배신의 기운이 깃드는 이 모순적 장면이야말로, 인간의 죄성과 하나님 사랑의 충돌이 얼마나 극심하게 드러나는지를 보여준다.

장재형목사는 사랑이라는 것은 강제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사랑 역시 인간을 ‘인격적 존재’로 인정하기 때문에 마음을 억지로 바꾸어 놓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유다의 배반은 결코 예수님이 의도하시거나 조장하신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끝까지 붙들어 주시려고 하셨지만 끝내는 돌이키지 않았던 유다의 자유의지적 반응이었다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결코 억지로 구원하지 않으시며, 우리 스스로 돌이켜 회개하도록 사랑으로 부르시되, 그 부름에 응답하지 않고 끝내 등을 돌리는 자에게는 그대로 내버려 두신다는 것이다.

이 본문에서 요한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요 13:21)고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기록한다. 당시 제자들에게는 이것이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함께 기적을 체험하고, 주님의 말씀을 가장 가까이에서 들었으며, 공동체에서 늘 같이 먹고 잤던 동료들 중 하나가 주님을 배반할 것이라는 사실은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미 배반할 자를 알고 계셨고, 그럼에도 마지막 순간까지 돌이키도록 기회를 주셨다. 요한복음 13장 20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것이 곧 하나님을 맞아들이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서 가장 중요한 믿음의 길임을 시사한다. 그런데도 유다는 이 권면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두고, “주님께서 영접을 요구하시는 그 순간이, 사실상 유다에게 허락된 마지막 회개의 기회였다”고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떡 한 조각을 적셔서 유다에게 주셨는데(요 13:26), 이것은 히브리 문화권에서 흔히 볼 수 있는‘가장 친밀한 사랑의 표현’ 혹은 ‘존경과 호의의 표시’다. 당시 유월절 식탁에서 떡을 적셔 주는 행위는 단순한 음식 나눔이 아니라, ‘특별한 친밀함’을 의미했다. 이는 곧 “나는 너를 여전히 사랑한다. 너를 향해 열려 있다”라는 주님의 마음을 드러내는 행동이다. 주님은 이미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유다가 돌아서서 회개하기를 간절히 바라셨다. 떡 한 조각은 도리어 유다에게 심판의 표시가 아니라, 그가 마음을 돌이키도록 베푸신 마지막 사랑의 초대였던 것이다.

그러나 유다는 그 떡을 받고도 돌이키지 않았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요 13:30). 장재형목사는 이 문장이 단순한 시점 보도를 넘어, ‘영적 암흑’과 ‘완고한 거부’가 동시에 드러나는 표현이라고 주석한다. 여기서 ‘밤이러라’는 물리적 시간의 밤인 동시에, 영적인 어둠에 빠져드는 유다의 상태를 상징한다. 유다가 식탁을 떠나자마자 달려간 곳은 대제사장들에게 주님을 넘길 합의를 끝맺는 자리였다(마 26:14-15 참조). 이는 거듭된 사랑의 경고와 권면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신의 이익과 세속적 기준에 갇혀 주님을 팔아넘기는 배반의 길을 선택해 버린 인간 내면의 비극이다.

왜 유다는 그토록 심각한 죄를 범하게 되었을까? 복음서 전체를 보면, 유다는 돈을 맡은 제자였고(요 13:29 참조),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부었을 때 그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았다고 불평했던 인물이기도 하다(요 12:4-6). 그는 공동체의 재정을 맡고 있었음에도 ‘돈을 훔쳤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요 12:6), 물질에 대한 탐심이 컸음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돈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만 유다의 배반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장재형목사는 유다의 문제를 더 근본적으로, “주님 말씀을 끊임없이 세속적 잣대로 평가하고, 자기 논리에 맞지 않으면 배척하는 교만한 마음”으로 본다. 즉, 그는 예수님의 사역 방식이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자,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정치적 메시아’로 이용하기보다 도리어 주님의 길이 ‘실패’라고 느끼고, 자신이 얻을 이득을 노리는 길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을 자기 욕망의 도구로 삼으려다 뜻대로 되지 않자 등을 돌리는 전형적인 불신앙의 모습으로도 볼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런 해석의 연장선에서, 오늘날에도 여러 모습으로 ‘유다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즉, 예배나 봉사를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세속적 야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있다. 혹은 예수님의 말씀을 끝까지 따르고 순종하기보다는, 어느 순간 자기 이성이나 세상적 가치관을 우선시하면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배척해 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가 깊어지면, 결국 유다처럼‘주님을 파는 지경’까지 이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배반이라는 행위는 극단적인 사건처럼 보이지만, 그 밑바탕에는 일상에서 반복되는 작은 불순종과 자기중심적 판단이 누적되어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작은 ‘밖으로 나감’이 쌓이고 쌓여서 결국에는 완전한 어둠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다른 한편,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고 심지어는 저주까지 했지만(마 26:69-74), 최후에는 회개함으로써 회복되었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가? 장재형목사는 “베드로의 배반은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에서 비롯된 것이고, 유다의 배반은 고집스럽게 끝까지 돌아서지 않은 것”이라고 분석한다. 베드로는 마음 깊이 예수님을 사랑했으나 두려움과 인간적 한계로 인하여 순간적으로 넘어졌고, 주님을 배반하기는 했어도 곧 통곡하며 회개했다(마 26:75). 반면 유다는 그 배반이 주님을 사랑함에도 어쩔 수 없이 순간적으로 넘어진 ‘실수’가 아니라, 스스로 의지를 동원하여 끝내 돌아서지 않고 주님을 팔아넘기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더 나아가 배반 후에도 회개에 이르지 못하고 자살의 길을 선택해 버린 것이(마 27:5), 그의 마음이 이미 주님과 완전히 분리되었음을 방증한다.

요한복음 13장 30절에서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라는 표현은, 이러한 그의 최종적 결심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핵심 구절이다. 밤에 나갔다는 것은, 당시에 단순히 ‘낮이 아닌 밤’이라는 시간을 의미하기도 하겠지만, 요한복음 특유의 ‘빛과 어둠’ 대조법으로 볼 때, 더욱 분명하게 ‘영적 어둠’에 내던져진 상태를 시사한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을 두고“유다가 영적으로 완전히 어둠에 잠식된 순간”이라고 설명한다. 주님은 바로 그 어둠을 보시면서도, 끝까지 유다를 놓지 않으려고 하셨지만, 유다는 자신의 발로 어둠 속으로 들어가기를 선택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류의 죄성이 부딪힐 때 일어나는 가장 비참한 장면 중 하나다.

그러나 이 장면을 통해 우리가 얻는 교훈이 단지 “유다는 큰 죄를 지은 나쁜 사람이다”라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장재형목사는“우리 안에도 작게나마 유다의 씨앗이 있는가를 늘 돌아보아야 한다”고 권고한다. 우리는 교회나 신앙 공동체 안에서, 혹은 하나님 앞에서 언제든 세속적 계산을 우선시하고, 주님의 말씀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서 마음에 불만을 품을 수 있다. 또,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도, 회개의 기회를 스스로 외면해 버리는 경우가 없지 않다. 이러한 우리 안의 ‘유다적 요소’를 발견한다면, 즉각 돌이켜 회개하고, 다시금 십자가 앞에 자신을 내어놓아야 한다. 주님은 언제나“돌이키라, 내게로 오라”라는 사랑의 메시지를 보내시지만, 억지로 우리의 마음을 뒤집지는 않으시므로, 결국 우리의 선택이 중요하다.

사실 예수님의 공동체 안에서 유다가 맡았던 ‘돈궤’는, 당시로서는 분명히 중요한 책임 위치였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예수님께서 그를 얼마나 믿으셨는가를 보여 주는 증거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돈은 인간의 죄성을 가장 첨예하게 드러내는 매개가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다스리고 선용할 때에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유익한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예수님께서 그를 의도적으로 시험에 빠뜨리려고 돈을 맡기신 것이 아니라, ‘유다가 이걸 잘 감당해 낼 수 있으리라’ 믿고 맡기신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유다는 점차 물질에 대한 집착과 세상적 시각을 버리지 못한 채, 주님을 향한 사랑보다는 개인적 욕망과 야망을 추구하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이 땅에서 정치적·군사적 혁명을 일으키는 왕’이 되어 주기를 기대했으나, 예수님의 길은 달랐다. 예수님은 더 낮아지고, 종의 모습으로 섬기시며, 심지어 죽기까지 복종하는 길을 걷겠다고 하신다. 유다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자기의 기대와 완전히 어긋났을 수 있다.

또한 옥합을 깨뜨린 마리아의 사건(요 12장)에서, 유다는 당시 헌금을 맡아 관리하던 인물이었기에, 그 옥합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을 도왔으면 좋았겠다는 식의 발언을 내놓는다. 이 언행 자체가 전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복음서의 부가 설명은 “그가 도둑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요 12:6). 즉, 유다의 불평은 진정으로 가난한 자를 위하기보다, 돈을 다른 용도로 전용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통해 ‘유다는 이미 예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마음에서 멀어져 있었다’고 짚어낸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할 때, 한편으로는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따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기 욕심이 개입되어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사랑을 사랑으로 보지 못하고, 은혜를 은혜로 보지 못하며, 늘 ‘이걸 팔아 돈을 만들면 더 좋지 않을까’라는 세속적 계산을 앞세울 때, 결국 우리 역시 유다처럼 성령의 음성을 거부하게 될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유다를 ‘바로 옆’에 앉히셨다고 전해진다. 고대 중동 지역의 식사 문화에 따르면, 손님들은 식탁 주변에 비스듬히 누워서 음식을 먹으며, 식탁에 함께 누운 이들의 머리와 가슴이 서로 가깝게 닿기도 하는 구조였다. 보통 주인의 오른편에는 가장 사랑하는 제자가, 왼편에는 신뢰하는 손님 또는 귀한 자리가 배정되었다고도 한다. 요한복음 13장23-2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해 있었고,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머릿짓하여 “주여, 누구를 말씀하십니까?”라고 묻는다. 이 구도상, 유다는 예수님의 다른 쪽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주님이 얼마나 마지막까지 유다를 가까이 두시고, 그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려고 하셨는지 알 수 있는 장면”이라고 언급한다. 사람이라면 보통 자기에게 악한 마음을 품고 있다고 의심되는 사람을 멀리 두거나, 공동체 밖으로 내쫓으려 할 텐데, 예수님은 오히려 마지막 만찬까지도 그의 곁에 두시며 기회를 주셨다.

그러나 유다는 그 마지막 사랑의 설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요 13:27)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그는 곧바로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요한은 “그때가 밤이러라”고 기록한다. 제자들은 어디로 가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고, 그저“명절에 쓸 물건을 사러 가는가 보다”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뭔가 나눠 주러 가는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요 13:29). 이 대목에서, 제자들이 서로 “누구일까?” 하고 의문을 품을 만큼, 유다는 외형상 평범하게 행동했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의 내면에 싹트는 배반의 씨앗은 쉽게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배반이 폭발하는 순간이 오기 전까지, 주변 사람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기도 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오늘날 교회 안의 현실에 비유하며, 겉으로는 크게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속에서 영적으로 병들고, 은혜의 끈을 놓아버려, 결국은 주님을 등지고 세상으로 달려가는 이들의 모습이 있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예수님께서 이토록 극진하게 마지막 권면을 주셨음에도, 유다가 굳게 닫힌 마음을 변화시키지 못한 것은, 사랑은 결코 강제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해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반복해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에, 억지로 우리의 마음을 개조하시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끊임없이 부르고, 때로는 죄를 징계하시며 돌이키도록 여러 방편을 사용하시지만, 마지막 결정은 결국 각자의 몫이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끝까지 권면하셨지만, 유다는 스스로 돌이키지 않기로 선택했고, 그로 인해 밤의 어둠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는 한편으로는 인간의 완고함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보여 주며,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의 자유의지 앞에서 ‘무력해 보이기까지 하는’ 고통의 측면을 드러낸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이 짧은 구절 속에는 어마어마한 영적 드라마가 압축되어 있다. 여기엔 배반자의 선택, 그로 인한 예수님의 고통, 그리고 아무것도 모른 채 흘러가는 제자 공동체의 무지(無知)가 함께 어우러진다. 제자들은“도대체 누굴 말하는 것인지” 몰랐고, 주님과 유다 사이에 흐르던 긴장감과 팽팽한 권면의 순간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곧이어 이어지는 본문의 맥락(요 13:31 이하)에서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며, 십자가로 가는 길을‘영광’의 길로 선포하신다. 이는 놀라운 역설이다. 제자 중 하나가 예수님을 팔아넘기러 나가는 이 암흑의 순간이, 동시에 인류를 구원하는 십자가의 역사가 시작되는 ‘하나님의 영광’의 때라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인간의 배반까지도 활용하여 더 큰 선을 이루신다”고 강조한다. 물론 이는 하나님께서 유다의 악행을 미리 예정하여 부추기셨다는 뜻이 결코 아니라, 비록 인간의 악이 극에 달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악을 최종적 결론으로 삼지 않으시고, 오히려 선으로 이끄시는 ‘섭리적 경륜’을 가지신다는 점을 나타낸다. 십자가를 통해 죄인들이 구원받고, 주님의 부활을 통해 죽음의 권세가 파괴되며, 성령 강림으로 교회가 태동하게 된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 유다는 자신의 역할을 어둠 쪽에서 맡았고, 그 결과 영원한 비극의 인물로 남았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에 틈이 있었거나, 혹은 유다가 애초부터 ‘회개할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주님의 길은 언제나 돌아오라고, 내게로 오라고 외치셨지만, 유다는 끝내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는” 배반의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도전은, “혹시 우리도 유다처럼,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그 말씀을 내 식대로 재단해 버리지는 않는가?” 하는 자각에 있다. 장재형목사는 특히 교회 안에서 오랜 신앙생활을 한 이들이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말씀을 많이 들었고, 예배도 오랫동안 드렸지만, 정작 내 삶의 깊은 곳에서 주님보다 ‘물질’이나 ‘자기 계획’을 더 신뢰하는 습성이 뿌리박혀 있을 수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역사하셔야 해”라는 고정관념에 갇혀, 실제 주님의 인도하심이 기대와 다르면 실망하고, 심지어는 주님을 향해 적대감이나 배반의 싹을 키울 위험도 있다. 유다의 사건은 결코 먼 옛날 이야기만이 아니라, 신앙공동체 안에서 지금도 재현될 수 있는 경고적 사례다.

반면,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마지막까지 놓지 않으시는 사랑’을 분명히 보아야 한다. 떡 한 조각을 건네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네가 정말 돌아서지 않겠느냐? 나는 너를 위해 언제나 열려 있다”라는 사랑의 음성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사랑의 음성이 우리가 듣는 복음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복음이란 단지 구원받는 ‘결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매 순간 주님의 사랑을‘영접’하는 마음의 태도를 의미하기도 한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3장 20절에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 이 영접(헬라어로는 ‘데코마이’ 혹은 ‘람바노’)은 단순히 손님을 맞이한다는 차원을 넘어, 전 인격을 다해 모셔 들이는 것을 뜻한다. 즉 주님의 말씀, 주님의 인격, 주님의 길을 내가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반대로 영접하지 않는다면, 그분의 사랑을 거부하고 문을 닫아 걸어버리는 것이 된다. 유다가 보여준 것은 바로 이 ‘거부’의 극단이다.

이제 우리는 이 본문을 마주하며, 몇 가지를 깊이 묵상해야 한다. 첫째, 내 안에 아직 해결되지 않은 세속적 야망이나 탐심, 돈이나 명예나 권력에 대한 잘못된 집착이 자리 잡고 있는지 성찰해야 한다. 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기적을 체험했으며, 심지어 재정을 맡은 책임까지 받을 만큼 신뢰받는 위치에 있었지만, 결국 그 탐심을 극복하지 못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도 세상적 성공이나 물질적 부를 신앙과 혼동하거나, 주님을 통해 자신의 야망을 이루려는 태도를 보이기 쉽다. 둘째,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내 기존의 편견과 고집이 꺾이지 않고는, 결국 유다처럼 “밖으로 나가 버리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말씀이 내 생각과 다를 때, 그 말씀을 순종하고자 마음을 비우는 과정이 없다면, 언젠가 우리의 완고함은 심각한 배반으로 이어질 수 있다. 셋째, 주님의 사랑은 끝까지 우리를 붙드신다는 사실을 믿고, 마지막까지 권면하시는 그분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유다는 “마지막 떡 조각”까지 받았지만 돌아서지 않았다. 우리는 혹시 이미 여러 번 ‘사랑의 떡 조각’을 받고도, 회개의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돌아볼 일이다.

장재형목사는, 결국 이 본문이 가리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과 인간의 죄성이 만나는 지점에서 드러나는 심판과 사랑의 갈등”이라고 말한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기 전날 밤, 가장 사랑하는 이들과 식탁을 나누셨고, 그 식탁에서 숭고한 발씻김과 아름다운 사랑의 교제가 이루어졌다. 동시에, 그 식탁은 유다의 배반이라는 최악의 죄가 싹트는 자리이기도 했다. 같은 만찬 자리에서 누군가는 주님을 가슴에 품고 “주여, 누구를 말씀하십니까?” 하고 눈물을 흘리며 그 음성을 구하지만, 또 다른 이는 은전 서른 닢을 받고 스승을 넘길 계략을 실행하려 한다. 빛과 어둠, 사랑과 배반, 구원과 심판이 한 자리에서 충돌하는 것이다.

이 충돌의 끝에서 요한복음 13장 30절은 “밤이러라”고 말한다. 이는 유다의 이야기이자, 동시에 우리 모두가 겪을 수 있는 어두운 시기를 상징한다. 그 어두운 밤을 지나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고, 잡히셔서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다. 그러나 주님은 그 어두운 밤을 통과하심으로써, 부활의 아침을 열어 보이신다. 유다처럼 어둠 속에 머무르느냐, 아니면 베드로처럼 눈물로 회개하여 부활의 주님 앞에 다시 설 것이냐, 그 선택은 지금도 우리 각인에게 주어진 숙제다. 장재형목사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을지라도, 회개를 통해 새롭게 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그러나 끝까지 마음을 닫는다면, 그것이 곧 ‘밤의 길’로 들어서는 행위가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우리는 이 권면에 귀 기울여야 한다.

궁극적으로, 요한복음 13장 20-30절은 인간이 어느 정도로 죄에 빠질 수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어디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예수님은 발씻김과 떡을 건네는 행위를 통해 사랑으로 호소하셨고,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말씀하실 때에도, 그저 쌀쌀맞게 내쫓으시려는 의도가 아니라 “끝까지 사랑하고 싶으나 더 이상 어쩔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 담겨 있었다. 유다는 이 사랑을 오해했고 거절했으며, 밖으로 나간 그 길은 다시 주님께 돌아오지 못할 길이었다. 그러나 그 어두운 밤의 사건으로 인해 십자가의 길이 열렸고, 그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구원의 은혜를 얻게 되었다. 이는 아이러니요, 동시에 하나님의 초월적 섭리다.

장재형목사가 이 본문을 설교할 때 가장 강조하는 점 중 하나는, “우리에게도 늘 떡 조각이 건네지고 있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말씀, 예배, 성찬, 기도, 다양한 공동체 생활을 통해 우리에게 계속해서 다가오신다. 그런데 우리가 그 떡 조각을 받을 때마다, 과연 그것을 주님의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마음을 열 것인지, 아니면 모양만 받고도 ‘밤’으로 향해 떠나 버릴 것인지 결정하게 된다. 신앙은 머리로 아는 지식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내 마음으로 주님을 모셔들이는 실제 행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말씀을 대할 때, 우리는 단지 유다를 비난하기보다는, ‘유다의 모습이 혹 내 안에 있는지’를 살펴야 하며, 동시에‘주님의 사랑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음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회개할 길이 열려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은혜인가.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고,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주시며, 성부 하나님과 연결되는 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 두셨다. 그 길로 들어오라는 초청을 매일같이 받고 있으면서도, 만약 우리의 마음이 세속적 가치관에 물들어 돌이키지 않는다면, 유다의 전철을 밟을 위험이 항시 도사리고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런 결론에 이른다. “내 안에 있는 탐욕과 교만, 그리고 완고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만 깨뜨려질 수 있다. 그런데 십자가를 믿고 사랑을 받아들인다면, 그 순간부터는 더 이상 ‘밤’으로 나갈 필요가 없다. 어둠에서 빛으로, 배반에서 순종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가는 것이 복음의 능력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떡 조각을 건네주시는 주님의 손길 앞에서 겸손히 엎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이미 밖으로 나가 버린 것 같은 죄책감을 느끼더라도, 베드로처럼 통곡하며 돌아올 수 있는 회개의 자리가 여전히 우리 앞에 놓여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유다가 끝내 놓치고 만 이 회개의 기회가, 살아 있는 우리에게는 아직 열려 있다.

결국 요한복음 13장 20-30절은, ‘유다가 어떻게 어둠으로 나갔고, 예수님은 그를 어떻게 마지막까지 붙들고자 하셨는지’를 보여 주는 동시에, ‘우리에게는 어떠한 선택의 기회가 있는지’를 심각하게 묻는 말씀이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이 한 구절은 성서 전체를 통틀어 가장 비극적인 문장 중 하나이지만, 동시에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과 경고, 그리고 반면교사는 지대하다. 우리가 진정으로 이 말씀을 묵상한다면, 자신의 마음속에 작은 배반의 씨앗이 싹트지 않는지 점검하게 되고, 혹 이미 씨앗이 자라나고 있다면 즉시 뽑아내고 회개해야 함을 깨닫게 된다. 또한 주님께서는 끝까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사랑의 약속을 붙들게 된다.

따라서 이 본문은 심판과 은혜가 교차하는 현장이자, 사랑과 미움이 함께 드러나는 자리이며, 동시에 주님의 강권적인 사랑이 아닌 ‘인격적인 초대’가 무엇인지 보여 주는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지금 살아서 숨 쉬고 있다는 사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예배와 말씀을 듣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마치 유월절 만찬에서 떡 한 조각을 받는 것과 같다”고 비유한다. 이 떡 조각을 받은 후 우리는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구부러진 길을 똑바로 펼치실 능력을 갖고 계시고, 또한 그 길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그러나 결국 ‘돌이킬 것인가, 거부하고 나갈 것인가’는 우리 각자의 결정이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회개하게 하시지만, 끝내 거부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유다의 사건을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이런 맥락에서 장재형목사는 “성도가 된다는 것은, 날마다 주님 앞에 자신을 꺾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애쓰는 삶”이라고 역설한다. 신앙생활은 단 한 순간의 결정이 아니라, 매일같이 주님의 초청을 받아들이느냐 거절하느냐의 선택을 반복하는 과정이다. 하루아침에 유다가 되는 사람은 없지만, 하루아침에 베드로처럼 회개하고 변화될 수도 없다. 다만 매 순간 영접과 순종을 반복하면서, 밤이 아닌 낮의 길, 어둠이 아닌 빛의 길, 배반이 아닌 헌신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이다. 그리고 그 길에서 우리는 늘 십자가의 은혜와 부활의 소망을 붙들게 된다. 요한복음 13장의 배경 안에 담긴 사랑, 고통, 배반, 권면, 회개, 영광의 모티프가 오늘 우리의 삶에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까닭이다.

정리하자면, 요한복음 13장 20-30절은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 상황과 유다의 배반이 교차하는 가장 긴박한 장면 가운데 하나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는 요한복음 기자의 진술은, 단순히 시간적 의미의 밤을 넘어서, 영적 어둠 속으로 들어간 유다의 최종적 결단을 함축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억압하지 않고 끝까지 초대하시는 모습, 그리고 그 초대를 거절함으로써 무서운 파국으로 치닫는 인간의 죄악된 고집스러움을 동시에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나아가 우리도 같은 교훈을 거울삼아, 날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여, 배반이 아닌 헌신을 택해야 함을 가르친다. 이것이 곧 “십자가 복음이 지금도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의 기회를 열어 두고 있다”는 진리이며, 동시에“마지막까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사랑”을 생생히 보여 주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과연 우리는 떡 조각을 받은 뒤에 어느 길로 나아갈 것인가? 이 질문 앞에, 우리는 유다처럼 끝내 등지고 어둠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처럼 회개하고 다시금 주님의 품에 나아가 부활의 아침을 함께 맞이하는 그 은혜로운 결말을 택하기를 소망해야 한다. 그리고 그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장재형목사를 비롯한 많은 설교자들이 거듭해서 강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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