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은 보름 전이었다. 부활절로 사순절은 끝이 났다. 그러나 그 때 내가 했던 묵상을 다시 되짚어보고 있다. 장재형 목사의 사순절 묵상집 십자가의 길은 이번 사순절에도 내게 큰 묵상 주제들을 던져주었다. 매년 어떻게 내가 바뀌었는가 재확인하고, 말씀에 비춰 나를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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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사순절 기간이다. 개신교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수난을 당하시고 부활하시기 전까지 약 40일간의 기간 동안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묵상하게 된다. 1년의 약 10분의 1 정도의 기간으로 나는 40일간 십자가에 대해서 묵상해야 하는 이 기간은 힘들다.
나의 멘토이자 스승인 장재형 목사가 사순절 기간 동안 설교한 것을 엮어서 ‘십자가의 길’이라는 사순절 묵상집이 나왔다. 요한복음 13장,18장19장을 중심으로 한 책인데 나는 사순절을 미리 가려고 한다. 올해 사순절은 2월 14일이다. 십자가의 길이라는 제목이지만 ‘다 이루었다’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다.
성경에는 딱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고 정의한다. 하나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유대인 그리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 이방인을 확장하면 그리스 로마 문화에 있던 문명인으로 봤던 헬라인(지식인) 그리고 문명인이 아닌 이방인으로도 나누었다. 대분류는 선민과 이방인 이 두부류로 나누었다. 그래서 유대인을 위한 사도는 베드로이고 이방인을 위한 사도는 바울로 대표된다.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가 군중 설교를 몇 차례 하는데 그때 베드로는 유대 선민들이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한다. 그리고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서 이방인이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한다. 요즘 말로 하면 크리스천들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 사도의 설교를 잘 봐야 하고 크리스천이 아닌 이들은 바울 사도가 이야기 한 로마서를 잘 봐야 한다.
베드로가 누구인가? 안네스의 법정에서 겁을 먹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한 제자이다. 그런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을 목격한 후 그가 스승인 예수님을 죽였던 안네스의 법정에 다시 서게 된다. 그 자리에서 그는 스승을 부인했던 나약한 모습이 아닌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를 한다. 그런데 그가 증거하는 메시지는 가히 충격적이다.
장재형 목사가 설교했던 사순절의 설교들은 베드로가 사도행전에 했던 몇 차례 설교들 시각과 일치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베드로의 시각이 어떤 것인가?
사도행전 2장
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37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사도행전 3장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사도행전 2장 36절에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3장 10절에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이게 베드로의 시각의 출발선 상인 거다. 이게 먼저는 전제되어야 한다. 첫 단추는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이다.
장재형목사(장다윗목사,David Jang)의 사순절 묵상집인 ‘십자가의 길’을 읽으면서 사순절을 기다리고 있다. 나에게 어떤 특별한 날을 기다리는 건 설렘이다. 여행을 간다든지, 외식을 한다든지, 손님을 기다린다든지 이런 기다림은 설렘의 감정이 우선이다.
그런데 사순절을 기다리는 건 설렘이라는 감정과는 거리가 멀다. 마치 다툰 부부와 같다고 할까. 가까이 있지만 왠지 남남처럼 느끼는 그런 애매모호한 감정 말이다.
요한복음 13장 1절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장재형 목사의 사순절 묵상집인 ‘십자가의 길’ 첫 번째 날은 이 구절로 시작을 한다.
불붙은 벽난로 옆에 앉아 조용한 사무실에서 이 구절을 읽으니 눈물이 난다. 숲을 천천히 걸으면 자동차를 타고 갈 때 보지 못한 것들을 보게 되는데, 천천히 느린 마음으로 이 구절을 읽으면서 이때 예수님이 어떠셨을까?를 생각해 보다.
어떠한 사고로 빨리 세상을 떠나길 원하는 이가 얼마나 있을까? 더군다나 누구도 가지지 않은 목표와 목적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것을 다 이루고 싶지 않을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유월절 전에 세상을 떠나실 것을 아셨다. 내가 불치병으로 시한부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면 이 구절이 더 다가오겠지. 하지만, 난 언제 세상을 떠날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 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이 장면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 장면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이 장면에 제자들이 되기도 해야 한다. 렘브란트가 그림을 때 자신도 한 주인공이 되는 그림을 그린 것처럼 나 또한 그래야 한다.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1 Now before the feast of the passover, when Jesus knew that his hour was come that he should depart out of this world unto the Father, having loved his own which were in the world, he loved them unto the end.
depart라고 되어 있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계시지만 그것을 넘어서서 부활과 승천을 우리가 기억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사순절을 묵상해야 한다. 사순절에 부활과 승천을 깊이 묵상하기보다는 오로지 죽음만을 생각해 보자.
부활하자면 반드시 죽어야 한다. 죽음이 없는 부활이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십자가를 앞둔 예수님이다. 그런데 죽음을 앞둔 스승의 마음을 3년간 동고동락했던 제자들은 헤아렸을까?
마 20장
19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20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23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24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나온다. 야고보와 사도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달라는 거다. 우리나라 말로 하면 영의정과 좌의정이 되길 원한다는. 물론 두 제자는 충분히 그럴만한 이들이었겠으나 24절에 보면 제자들은 분히 여긴다. 장 목사는 제자들이 분히 여기는 것은 예수님의 섬김과 희생의 가치를 알지 못한 것에 대해 분히 여겼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다른 제자들도 높아 지길 원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고 본다.
성경에서 말하는 큰 자는 누구인가? 섬기지는 자가 주인이라고 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늘 이런 가르침을 받았을 것이고 그렇게 사셨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했다. 그런데 그게 겨우 3년이었다. 흔히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떻게 저럴 수 있지?라고 생각하지만 이들은 겨우 3년간 예수님과 함께 했을 뿐이다. 뭐라 할거 없다.
그러면서 장재형 목사가 이야기하는 성경은 누가복음 22장의 말씀이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26 너희는 그렇지 않을찌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찌니라
27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나라를 이야기하셨다. 요한계시록 21장 1절의 말씀처럼 이전과 다른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이다. 이전의 모든 것들이 근본적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새로운 세계가 올 것이라는 건데 이것을 종말이라고 한다. 그런데 종말이 어떻게 오는가? 여러 가지로 올 수 있지만 “가치관의 종말”이라고 장 목사는 이야기한다.
그렇다. 흔히 섬기는 자는 종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섬기는 자가 주인이라고 하셨다. 세상은 높아지려면 높아져야 한다고 하는데 주님께서는 높아지려면 낮아지라고 하셨다. 이것이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법이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가치관과 완전히 반대되는 가치관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했지만 온전한 종말을 체험했는가? 아직 아니다. 이전의 모든 것들이 다 죽고 살아났는가? 아직 아니다. 여전히 세속적인 가치관에 사로잡혀있다고 장다윗목사는 말한다.
나에게는 이런 모습이 없는가? 오히려 제자들 보다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지는 않다. 얼마나 잘 못된 가치관을 가지고 여전한 방식으로 살아가려고 하는가? 나는 이전의 것들에 종말을 고하고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고 싶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주님께서는 여전히 변화되지 못한 제자들임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신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이 무엇이고 진정한 영광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신 것이다.
눅22장
15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십자가의 길에서는 이 구절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고 있지만 나는 이 구절을 묵상하고 싶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할 때 유월절을 처음 경험했다. 양을 잡아 문설주에 그 피를 발랐고 이것을 기념한 거다. 포도주와 떡, 예수님의 살과 피
죽음을 앞두고 있지만 여전히 변해야 할 게 있던 제자들을 다시 또 가르치신다. 잘 못을 깨닫게 하시고 그것을 뉘우쳐 새롭게 되길 원하시던 예수님이다.
우리는 흔히 갈등이 생기면 넘어가려고 하지 않은가? 그 고통을 외면하지 말고 부딪혀 해결해야 한다. 그래야 발전이 있는 게 아닌가.